[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27) ‘조치알 정신’ 빛나는 문화예술

입력 2013-10-06 17:29 수정 2013-10-06 14:12


기독교에 뿌리 둔 조치알, 독일 문화부흥 일구다

독일 사회에는 조치알(Sozial) 정신이 흐른다. 공동선을 추구하고 평등과 조화를 중시하며 공존과 배려를 강조하는 이 정신은 독일의 정치, 사회는 물론이고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힘을 발휘하는 원천이다. 조치알 정신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지난달 10일, 독일의 문화·예술을 취재하기 위해 수도 베를린의 ‘박물관 섬’에 위치한 ‘베를리너돔교회’를 찾았다. 흔히 독일하면 쾰른대성당을 떠올린다. 분단시절 쾰른대성당의 그늘에 가려 있던 베를리너돔교회는 통독 후 급부상하는 구 동독지역 관광 명소다.

이 교회는 조치알 정신과 관련해 각별한 곳이다. 독일 개신교회의 맏형격인 이 교회는 1539년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영향을 받은 선제후 요아힘 2세가 종교개혁을 받아들이면서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회로 바뀌었다. 푸른색 돔의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교회당 파사드 앞 청동 부조가 그걸 말해준다. 거기, 16세기 유럽 사회에 일대 변혁의 광풍을 몰고 온 종교 개혁가 루터가 라틴어로 되어있어 사제들만 독점하던 성경을 평민의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하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조치알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치알의 개념은 어디서 시작되나=언어는 사회적이다. 그 나라 역사와 관련이 있다. 영어 단어 ‘소셜(social)’이 미국에서 ‘안티 리버벌(반자유주의의)’의 뜻을 지니는 배경에 1950년대 매카시 열풍의 영향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영어의 소셜에 해당하면서도 독일에서는 다르게 쓰이는 조치알의 개념적 연원을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찾는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논제’라는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가톨릭의 부패를 상징하는 면죄부 판매에 반기를 들었다. 사실상 사치와 부패에 빠진 교회 재산의 재분배를 요구한 것으로, 농민층뿐 아니라 식자층의 공감을 얻었다.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의 성직계급이 가져왔던 사회 계급구조의 종말을 불렀다. 루터의 디아코니아 신학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섬김’과 ‘봉사’를 뜻하는 희랍어 디아코니아(diakonia)에서 온 이 신학은 개인의 자유와 함께 공동체의 행복·복지가 사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잉태시켰다.

성경은 곳곳에서 자유를 언급하면서 동시에 이웃과 짐을 나눠 지라고 강조한다. 특히 갈라디아서가 그렇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라디아서 5장 13절). 지금도 독일 사회를 움직이는 복지, 공동체, 평등 개념을 내포하는 조치알 정신은 루터에 의해 탄생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에 뿌리를 둔 조치알 정신은 관습적으로 이어져 체화되었고 오늘날 조치알슈타트(Sozialstaat), 즉 사회복지국가라는 국가이념으로까지 구현되고 있다.

조치알 정신은 독일의 문화·예술 분야에도 큰 힘을 발휘한다. 문화의 어머니처럼 수백년 흘러오며 정부의 문화 정책, 예술가와 개인들의 문화활동을 관통하고 있다. 문화·예술에서 공존과 조화, 배려의 조치알 정신은 종교개혁 당시 거셌던 성상파괴운동에서 시원을 찾아볼 수 있다.

◇공존과 배려…풍부해진 독일문화 유산=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의 인접한 나라로 들불처럼 번졌다. 스위스 네덜란드 등에선 칼뱅과 츠빙글리의 급진적 복음주의 영향으로 성상(聖像) 파괴 운동이 극심하게 일어났다.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교회 안을 장식했던 성화와 조각은 부서졌다. 경배의 상징인 제단화도 내려졌다. 극단적인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권위주의를 위해 쓰인다며 파이프오르간의 사용마저 금지했다. 칼뱅의 영향이 컸던 네덜란드에서는 교회장식화 등을 그리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화가들이 교회의 주문이 끊어지면서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등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정작 종교개혁의 출발지였던 독일은 달랐다. 루터가 성화 종교 미술 및 파이프오르간 음악이 갖는 교화적 성격을 인정해 긍정적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독일의 종교 예술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담아내면서 다른 장르와 조화를 이뤄 더욱 풍성해졌다.

독일 미술의 최고봉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는 뒤러는 가톨릭 신자로서 판화로 유명세를 얻었다. 또한 많은 성화도 남겼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바울 베드로 마가 요한을 담은 ‘네 성인’이다. 전한호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세 폭으로 중앙을 크게 드러나게 했던 기존 제단화를 중앙을 없애고 두폭에 담아 평등성을 강조함으로써 종교개혁 정신을 살렸다”고 평가했다.

교회음악도 마찬가지다. 파이프오르간 제작이 타 국가와 달리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작곡가들은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 교회음악을 열정적으로 만들어 냈다. 명곡으로 평가받는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등을 작곡한 바로크음악의 완성자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는 그 당시의 조치알 정신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나치에 열광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며 현대 자본주의 각박함 속에서도 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뤄가는 독일의 밑바탕에는 조치알 정신이 흐른다.

베를린·라이프치히=글·사진 손영옥 문화생활부장 yosohn@kmib.co.kr

■ 자문해주신 분들

▲귄터 콜로트치에 베를린주 문화담당 대변인 ▲우베 노이매르커 유대인 희생자 기념재단 사무국장 ▲외르크 슈페르너 쾰른 대성당 건축담당 돔바우 휘테 ▲볼프강 자이펜 베를린국립예술대학교 교수 ▲볼프강 이멘하우젠 갤러리 무터 푸라제 대표 ▲박종화 국민문화재단 이사장 ▲말테 리노 루터대학교 교수 ▲김재신 주독일대사 ▲윤종석 주독일 한국문화원장 ▲추태화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맹완호 독일문화원 문화협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