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친자 확인 바람] 못 믿을 세상 내 핏줄 맞나
입력 2013-10-04 17:47
“저는 큰아버지의 아들로 입양돼 호적에 올려진 상태입니다. 더 자라서도 ‘동네북’처럼 살기 싫습니다. 파양 신청을 하고 가족과 남남으로 살려면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하면 되나요?”
“얼마 전 가정법원에서 친자확인 검사가 필요하다는 우편이 왔습니다. 이혼해서 저를 떠난 친어머니께서, 제가 친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재산분배 목적으로 소송을 건 것 같습니다….”
“예전에 만나던 여자가 9년 만에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헤어질 때 여자가 임신 중이었지만 제 아이인지는 불확실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 여자의 부친과 합의해 다시는 연락하는 일이 없기로 각서를 썼습니다. 친자확인을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친자확인’이라는 말은 더 이상 생경하지 않다. 4일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법원에 접수된 친생자관계존부확인 또는 친생부인 관련 소송 건수는 4860건이다. 이는 9년 전인 2003년(2292건)의 배를 넘는 수치다. 드라마에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받아들기 직전 긴장하는 남녀 주인공이 등장하고,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로 지목된 11세 소년이 과연 친자인지를 궁금해하는 기사는 신문 지면을 연일 달군다.
친자확인이 친숙해지면서 유전자 검사 기관들도 우후죽순 늘어난 상태다. 100%에 수렴하는 정확도와 1∼2일 내로 결과가 전달되는 편의성으로 유전자 검사 기관을 찾는 ‘고객’도 많아졌다. 5년 전만 해도 친자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에는 2인 기준 100만원이 소요됐지만 요즘은 12만원씩 24만원이 업계의 시세다. 한 비의료기관 유전자 연구소 대표는 “2∼3년 사이 개인 확인 용도로 의뢰하는 고객이 배 가까이 늘었다”며 “가격의 합리화와 막장 드라마들의 홍보 덕분”이라고 진단했다.
친자확인 열풍은 대한민국의 ‘불신사회’를 대변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믿고 살아가기’보다 ‘속 시원히 까보기’를 좋아하는 문화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한 유전자 연구소 대표는 “친자확인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부부나 가족 사이에서 덮어두고 살아갈 만한 것일 텐데, 이제는 조그마한 의혹이 생겨도 그때그때 풀려고들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바람을 타고 ‘법원 제출용’만큼이나 ‘개인 확인용’ 유전자 검사 수요가 늘었다는 것이 업계의 전언이다. 서류상으로 동의를 확인하고 검사를 진행하지만, 과연 의뢰자의 상대방은 유전자 검사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까 싶을 때도 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유전자 연구소 대표는 “개인 확인 용도일 때 의뢰 당사자는 머리카락을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상대방의 것은 쓰던 칫솔이나 휴지, 담배꽁초나 깎인 손발톱 조각 등 상대방 몰래 채취한 듯한 ‘샘플’을 많이 가져온다”고 말했다.
물론 상대방의 동의 없이 유전자 정보를 습득, 확인을 의뢰하는 것은 불법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시신이나 응급상황 등 특수한 때가 아니면 동의 없이 유전자 검사를 의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상대의 동의를 얻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긴 하다. 미성년자인 자녀의 법정대리인이 자신과 자녀의 유전자 검사를 의뢰할 때다. 복지부 관계자는 “친자가 맞는지 의심이 생긴 아버지가 아들의 칫솔을 몰래 가져와 유전자 대조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용인된다”고 말했다. 아들이 유전자 검사에 응할 것인지 법정대리인인 아버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옆집 아동이 자신의 친아들 같다고 해서 그 아이가 쓴 휴지를 몰래 가져오면 불법이다. 이때는 옆집 아저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