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타이밍’의 정치학] 때를 아는 자, 여론을 얻는다… ‘타이밍 전쟁’

입력 2013-10-05 00:38 수정 2013-10-05 04:05


법무부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의혹을 진상조사하겠다고 발표한 시점은 9월 13일 ‘금요일 오후’였다. 청와대가 ‘채 총장 사표 수리 불가’라는 강경 입장을 밝힌 것은 일요일인 9월 15일, 추석 연휴를 사흘 앞둔 시점이었다.

채 총장 사퇴를 불러온 법무부의 이례적 진상조사 착수 발표는 절묘한 타이밍이라는 평을 들었다. 현직 검찰총장에 대한 법무부의 진상조사 발표 자체가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채 총장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를 놓고 갈등했다는 사실도 이미 알려진 터였다. 채 총장이 사퇴하고, 일선 검사들이 반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았다. 그러나 평검사회의 등 일선 검사들의 반발은 예상보다 크지 않았다. ‘혼외아들’이라는 사안의 성격과 검찰 간부들의 자제 당부가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금요일이라는 발표 시점도 반발 확산을 막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들이 많았다. 한 검찰 간부는 “검찰의 반발기류가 있다 하더라도 주말과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겠느냐”며 “발표하는 ‘타이밍’을 고려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고 말했다.

금요일에 제작되는 토요일자 신문은 평일자 신문보다 지면이 적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사전 제작된 기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금요일에 발생하는 기사 중에서 지면에 들어가는 건 많지 않다. 언론사들의 이런 제작 시스템을 안다면 기사화를 꺼리거나 대대적 보도를 원치 않는 입장에서는 금요일 발표를 선택하기 쉽다.

자신들의 의도대로 여론을 움직이거나 효과 극대화를 위해 ‘발표 타이밍’을 계산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경찰의 ‘국정원 댓글 사건 중간 수사 발표’도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사건을 담당했던 서울 수서경찰서는 지난해 12월 15일 밤 11시 갑작스럽게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밤 11시는 조간 신문사들의 기사 마감이 임박한 시간이다. 마감 직전 보도자료를 받은 기자들은 경찰의 수사 방식과 발표 내용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을 할 시간도 없이 경찰의 발표 내용을 중심으로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언론사들은 다음날 경찰에 ‘기습적인 보도자료 배포’에 항의했다. 경찰은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기 때문에 수사 결과가 나온 즉시 언론에 알린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의 해명은 10개월이 지나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달 6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재판에서는 경찰이 사건을 축소·은폐하고 증거 분석이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수사 결과 발표 날짜를 미리 정하는 등 사전 모의한 증거가 공개됐다. 경찰이 시점을 고려해 발표했다는 정황이 확인된 것이다.

검찰 역시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결과를 금요일에 발표해 ‘타이밍’ 논란에 휘말렸다. 법조 출입 기자들은 “주말에 지면이 줄어드는 것을 알지 않느냐. 논란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으나 검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보도자료 배포 업체 ‘뉴스와이어’가 지난 5월 작성한 ‘보도자료 배포 타이밍 노하우’에는 ‘(연휴 등) 공휴일이 다가오는 경우엔 보도자료 배포를 보류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 담겨 있다. ‘오전 8시30분∼10시30분에 보도자료를 보내라’ ‘토요일자 신문은 얇기 때문에 금요일에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내용도 있다. 내용이 충실한 보도를 원한다면 연휴를 앞둔 시점이나 하루 중 오후, 금요일에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것을 피하라는 것인데, 법무부의 채 전 총장 진상조사 발표는 ‘보도가 제대로 안 되는 조건’을 모두 충족한 셈이다.

불리한 정국 전환을 위해 폭발력이 강한 뉴스를 적절한 타이밍에 꺼내놓는 경우도 있다. 국정원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죄’ 수사를 꺼낸 시점이 이러한 의혹을 샀다. 국정원은 대선 개입 및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논란 등으로 정치권과 여론의 거센 개혁을 요구받는 상황이었다. 국정원은 국정원 개혁 논의가 예정돼 있던 정기국회를 1주일가량 앞둔 시점에 이석기 사건을 공개했다. 국정원은 이석기 사건을 들이대면서 국내 파트 존속과 대공수사권 강화 등을 주장하고 있다. 사건의 실체와는 무관하게 국정원이 ‘타이밍 정치’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많이 받았다.

국정원의 ‘절묘한 타이밍’ 발표는 이뿐만이 아니다. 국정원은 지난 6월 24일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다. 여야가 국정원 댓글 국정조사에 합의한 직후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 와중에 정상회담 대화록이 전격 공개됐다. 이후 여론은 급속도로 대화록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북한도 발표의 타이밍 효과를 노리는 수법을 자주 쓴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1일 오후 5시2분에 장거리 로켓 발사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워싱턴 시각으로 토요일 오전 3시2분이다. 당시 전문가들은 ‘미국 등 관련국이 긴장을 풀고 있을 주말을 활용해 메시지 전달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로켓 발사 연기 가능성을 발표한 시간도 주말 밤인 9일 0시36분이었다. 북한은 2006년 장거리 로켓 발사를 미국 독립기념일(7월 4일)에 맞췄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일(2008년 2월 25일)에는 뉴욕필하모니를 평양으로 초청해 공연을 펼쳤다. 전영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연구교수는 4일 “북한의 모든 발표는 전략적 판단에 근거한 선전선동의 일환”이라며 “북한이 미국을 겨냥한 최상의 시기를 고민 끝에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기관이 타이밍을 따져가며 언론에 발표하는 것에 대해 국민의 알권리를 통제하는 행태라고 지적했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검찰이나 경찰, 국정원 등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권력기관이 비난받을 소지가 있거나 스스로에게 불편한 내용이라고 해서 의도적으로 왜곡해 발표하는 것은 잘못된 행태”라며 “정부기관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 최대한 많은 국민이 제대로 알 수 있는 시간과 방법으로 발표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