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전두환家 그림들
입력 2013-10-04 18:38
검찰이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미납 추징금 환수과정에서 확보한 미술품 목록 중 일부를 언론에 공개했다. 전 전 대통령과 장남 재국(54)씨로부터 압류한 미술품 500여점 가운데 주요 작품 15점을 선보인 것이다.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면면을 보면 전씨 일가의 컬렉션이 만만찮다. 김환기, 천경자, 이대원,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데미언 허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등등.
검찰은 압류재산 환수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미술품의 매각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전씨 일가의 미술품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판매해 환수 금액을 높이겠다는 계산이다. 매각 방식은 서울옥션 등 미술품 경매사를 통하거나 소장 희망자와 수의계약을 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계 인사들은 이 작품들이 많게는 수억원까지 호가하고 적게는 수백만원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7월 전 전 대통령 사저에서 압류한 이대원 화백의 ‘농원’은 홍익대 총장을 역임한 이 화백이 생전에 전 전 대통령에게 주려고 특별 제작해 직접 선물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시가대로라면 이 작품은 최대 6억원까지 호가하는 것으로 화랑계는 추산하고 있다.
나머지 대부분은 재국씨가 수집·소장해온 작품들이다.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인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눈에 띈다. 김 화백 작품의 특징인 점묘 기법이 사용됐다. 다만 유화가 아니라 종이에 과슈(gouache) 물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화라면 억대까지 나가겠지만 종이 그림이라면 5000만∼6000만원 정도로 떨어진다.
한국 대표 여류 화가인 천경자 화백의 ‘여인’은 판화로 드러났다. 천 화백의 판화는 경매에서 100만원부터 시작해 1000만원까지 오른다. ‘설악산 작가’로 잘 알려진 김종학 화백의 ‘꽃’은 10호짜리가 2000만원, 100호짜리가 1억5000만원 정도에 거래된다고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블루칩 작가로 부상한 오치균 화백의 ‘집’은 50호짜리가 6000만∼8000만원을 호가한다.
사진작가 배병우의 ‘소나무’, 변종하 화백의 ‘새와 여인’ 등 현대 작가들의 작품과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호생관 최북 등 조선시대 화가들의 작품이 수록된 화첩도 공개됐다. 인사동 고미술계에서는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진품이라면 1억∼2억원 정도라고 전망한다. 심사정 작품은 4000만∼5000만원, 최북 작품은 5000만∼7000만원으로 평가받는다.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은 판화가 주를 이룬다.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인 장샤오강의 ‘혈연’ 시리즈 판화는 1000만∼1500만원, 영국 작가 데미언 허스트가 해골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만든 ‘신의 사랑을 위하여’ 실크스크린 판화는 2000만∼3000만원 정도다. 이탈리아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의 ‘우상’, 아일랜드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무제’도 나왔다.
해외 작가들의 작품은 희소가치가 있기 때문에 몇 배 이상의 가격으로 팔릴 수도 있다는 게 미술계의 분석이다. 하지만 문제는 작품의 족보다. 언제 누구에게서 어떤 경로를 거쳐 얼마에 구입했는지 기록이 없는 그림은 자칫 ‘장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품과 위작을 가려내기 위해서라도 작품의 유통경로 파악은 필수적이다.
검찰이 이에 대한 자료 확보나 검증도 없이, 미술계의 의견수렴도 없이 작품을 공개한 후 경매에 부치겠다고 생각했다면 계산착오다. 가뜩이나 미술품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 압수품을 비싼 가격으로, 그것도 공개적으로 사려는 컬렉터가 얼마나 될까. 마치 죄인 취급당한 그림이 주인을 찾지 못하고 어두운 창고에서 지내지 않기를 바란다.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