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로마 제국이 남긴 외설적인 그림들과 조각상들, 성을 상징하는 다양한 생활용품들, 그리고 성과 관련하여 공포된 법률과 역사 기록들을 보면 로마인들은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긴 것이 분명하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모든 이방인들의 죄악을 지적했을 때 동성애를 격하게 비난했던 것을 보면 성적 방종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것을 알게 된다(1:26∼27).
바울의 거듭된 경고
로마는 매춘을 합법화시켰고 남색을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매매춘, 음란, 정욕, 호색을 반복해 경고하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롬 13:13; 고전 7:16∼18; 고후 12:21; 갈 5:19). 그는 이 정도 절제에서 머물지 않고 더 나갔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미혼자들과 젊은 과부들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고전 7:1∼9). 정욕이 불타올라 견딜 수 없는 자는 결혼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생활에 철퇴를 내리치자 교회는 결혼을 어찌할 수 없는 성욕을 푸는 필요악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더 우월한 삶의 방식이라고 믿었던 독신을 사제들에게는 강요하기 시작했다. 독신 사제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평신도들의 성문제도 더 강하게 규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결혼한 부부사이일지라도 성행위는 오직 자녀 생산을 위한 목적을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을 벗어난 부부의 성행위는 가벼운 ‘용서받을 수 있는 죄’로 규정했다. 그는 부부가 성행위 없이 친교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이상적 부부관계를 설정했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성 구별 없이 지냈으며, 성에 눈을 뜬 것은 낙원에서 추방된 후라고 가르쳤다. 그들의 타락 이전 성생활은 차원이 다른 행위로 의지의 통제를 따른 조용한 결합, 그럼에도 최상의 즐거움이 있는 행위였다고 상상했다.
그의 이런 생물학적인 판단은 중세교회를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를 거기다 버려두고 그냥 떠났다. 타락한 결과로 모든 인간은 ‘통제되지 않는 정욕’을 지니고 평생 고통당하며 산다고 해놓고서 구체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행히 초대교회의 독신 제도를 그대로 따랐던 수도사들은 이를 터득하고 전했다. 이들이 열망했던 삶의 목표는 천사 같은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막은 천사같이 사는 법을 배우고 미리 그렇게 살아보는 낙원이었다. 금욕경성은 잃어버린 낙원의 삶을 되찾는 길이었다. 수도원운동이 시작되고 150년이 흐르는 동안 순결을 얻기 위한 피나는 전투에서 수도사들은 정욕을 이기는 노하우를 터득했다. 사막에는 이 전투에 얽힌 일화와 가르침들이 산재해 있었다.
원로 수도사 롱기누스는 “영혼에게서 정욕이 흘러나오지 않으면 영혼은 자신이 성령을 잉태했음을 안다. 정욕을 버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가르친다. 이성과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충동을 어떻게 버려야 하는가.
한 젊은 수도사가 있었는데 늘 정욕적인 생각 때문에 시달렸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자 절망해 세속으로 돌아갔다. 그를 만난 원로 수도사 아폴로는 이렇게 위로했다. “그런 생각이 든다고 이상히 여기지 말게.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도 말게나. 나도 나이가 들었어도 그런 종류의 생각 때문에 시달리곤 한다네. 그러니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게나.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비밖에 없네.” 그렇게 권하고 함께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수도사들은 정욕에 시달릴 때마다 자신을 그분 앞에 완전히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매달렸다. 자신의 무능을 고백할 때 주님이 오셔서 돕는 것을 전 생애에 걸쳐 체험하고 살았다. 얼마나 오래 이 일을 해야 할까. 안토니는 15년이 걸렸고 어떤 수도사들은 늙어서도 정욕과 싸웠다고 한다. 여성 은둔자 사라는 13년 동안 맹렬하게 정욕과 싸웠다. 기도 중에 한 번도 그 싸움에서 놓여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다만 “주여! 저에게 싸울 힘을 주소서”라고만 간청했다. 사라처럼 이 싸움을 위해 수도사들은 기억하기 쉬운 짧은 기도문을 사용했다. 원로 수도사 이삭은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려면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라는 기도를 항상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경건한 고백과 경계
이 짧은 기도가 좋은 것은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겸손하고 경건한 고백이며, 악을 경계하며 자기가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응답을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며 그분이 내 옆에 계심을 믿고 끊임없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그 외에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김진하<백석대 교수>
[사막의 영성] 순결을 향한 전투
입력 2013-10-04 1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