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마흔넷 김부장 이야기

입력 2013-10-03 17:38


개천절인 3일 그는 아내와 초등학교·중학교 두 아이를 2000㏄ 자가용에 태우고 교외로 달렸다. 앞 유리 너머 가을하늘이 파랬다. 오른편으로 강변북로를 따라 한강이 함께 달렸다. 인생은 머뭇대도 강물은 흐르는구나. 올해 나이 마흔넷. 김 부장은 생각했다.

10년쯤 대기업 영업맨으로 살았다. 과장 3년차가 되던 해, 직속 본부장을 따라 회사를 옮겼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구조조정과 합병으로 휘청대는 대기업과 입지 탄탄한 중견기업. 답은 쉽게 나왔다.

이직한 지 6년. 그를 데려간 본부장은 사내 파워게임에서 밀려 회사를 떠났다. 패키지로 따라왔던 그 역시 버티기가 어렵게 됐다. 중소기업 이직 후 2년. 이번엔 회사가 흔들렸다. 명문대 공대 출신인 김 부장은 학과 사무실 앞에 대기업 지원서류가 광고전단지처럼 뒹굴던 시절 취업했다. 대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다시 중소기업으로 옮길 때도 위기의식은 크지 않았다. 솔직히 10년, 6년, 2년 근속연수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조차 그는 깨닫지 못했다.

서울 시내 5억원대 아파트, 서너 개의 연금저축, 18년의 영업경력, 전업주부 아내와 두 아이, 아직 건강한 몸. 폐업절차를 밟는 회사를 떠나던 날, 김 부장은 그의 손에 남은 것들을 따져보았다. 이것들을 움켜쥔 채 만65세 ‘공식’ 노인의 결승점까지 달려야 한다.

아내와 머리를 맞댔다. 적금을 깨고 국민연금 개인연금을 줄줄이 중단시켰다. 아이들 학원은 유지하기로 했다. 애들이 제때 독립하려면 ‘투자’는 꼭 필요했다. 강변북로를 달리면서 김 부장은 생각했다. 앞으로 많은 게 달라지겠구나.

40대 중반 김 부장은 인생에서 일종의 성장기, 집을 사고 자산을 불리는 팽창의 시기가 끝났다는 걸 이해했다. 누구에게는 조금 일찍, 다른 이에게는 몇 발 늦게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다수에게 김 부장과 같은 끝은 찾아온다. 불행하게도 이들이 중심에서 주변부로, 상층에서 하층부로 밀려나는 시기는 지출이 폭발하는 때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가장 왕성하게 먹고, 열심히 학원을 다니고, 치열하게 방황한다. 김 부장이 그렇듯 오늘 신발끈을 동여매고 위기를 돌파하고 있는 다수의 40∼50대에게 노후대비는 먼 나라 일이다.

추석을 전후로 정국은 기초연금 공약 파기를 놓고 들끓었다.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씩 주겠다던 기초연금 공약이 몇 차례 우여곡절 끝에 ‘소득 하위 70% 노인을 대상으로 최대 20만원을 차등 지급’하는 형식으로 수정 확정됐다. 소득으로 30% 부유한 노인을 선별해내고, 국민연금 가입기간과 연계해 액수를 깎기로 한 것이다. 국회 통과 후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파워엘리트들의 최종결론이 선별과 차등 복지라는 건 확인됐다.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우리가 했던 거대한 오해도 분명해졌다. 그때는 권력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해한 줄 알았다. 괜찮은 직장을 가진 화이트칼라들, 먹고살 만한 중산층, 주말이면 교외로 캠핑을 떠나고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이들이 왜 그토록 무상급식이니 무상보육, 반값등록금 같은 구호에 열광했는지. 그들이 정말 알게 된 줄 알았다. 중산층이 무엇을 붙잡고 어디에 매달려 떨고 있는지 말이다.

막 밀려난 사람과 곧 밀려날 사람, 언제 밀려날지 모를 사람들로 뒤범벅이 된 오늘 40∼50대 중산층의 맨얼굴을, 그들도 본 줄 알았다. 착각한 건 우리들이었다.

이영미 사회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