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명희] 양치기 정부 될라
입력 2013-10-03 17:31
“국민연금 가입자 손해보는 본질 외면한 채 국민 호도하면 반발 부를 수밖에 없다”
노암 촘스키와 함께 ‘미국 현대사의 양심’으로 불리는 역사가 하워드 진의 평론들을 모은 책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론의 변화란 애초에는 정부의 정책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고 여긴 낮은 수준의 불만에서 비롯된다. 정부 정책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분노가 일어나고,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발언하며 조직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이라크 전쟁을 벌인 조지 W 부시 등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잘못된 정책들을 비판한 것이지만 복지공약 후퇴 논란을 빚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난 8월 세제개편안 파문과 최근의 기초연금 공약수정 논란에 대처하는 정부 모습이 판박이다. 내년도 세제개편안이 연봉 3450만원 이상 중산층 근로자들의 세부담을 올리는 사실상 ‘증세’라는 비판이 일자 정부는 “새로운 세목을 신설하거나 세율을 인상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증세가 아니다”고 우겼다. 조원동 경제수석도 나서 증세가 아니라며 프랑스 루이 14세 시절 재무장관인 장 바티스트 콜베르 말을 인용해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빼내려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득공제 혜택이 많이 사라지면서 명백히 중산층 세부담이 늘어나는데도 증세가 아니라는 건 억지다.
이번 기초연금 공약 수정 과정에서도 정부는 국민들을 기망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65세 이상 모든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씩 기초연금을 주겠다고 공약했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가 65세 이상 노인 80%에게 단계적으로 월 20만원까지 주겠다고 들고 나오자 이에 대적하기 위한 거였다. 급속한 고령화로 재정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뻔한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까지 똑같이 돈을 주겠다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대통령이 사과하면서 내년 7월부터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최대 월 20만원을 차등해 주는 것으로 수정했다.
문제는 국민연금 가입기간에 따라 차등지급하겠다는 방식이다. 그동안 성실히 일하면서 국민연금을 꼬박꼬박 낸 중산층들은 기초연금을 덜 받게 되니 상대적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엉뚱한 숫자놀음을 하며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박 대통령은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길수록 손해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과 다르며 가입기간이 길수록 가입자가 받게 되는 총급여액은 늘어나 더 이익이 된다”고 했다. 최원영 고용복지수석도 “국민연금에 기초연금을 추가로 해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연금에 오래 가입하면 할수록 총 연금이 더욱 많아져 이득을 보게 된다”고 했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합하면 당연히 국민연금 가입자가 많이 받게 된다. 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다.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반발하는 것은 국민연금에 12년 이상 가입하면 기초연금액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국민연금 가입자들은 은퇴한 공무원이나 교사, 군인보다 연금을 적게 받고 있어 불만이 큰 상황이다.
정부는 소득+자산평가액에 따라 차등지급하는 것보다 국민연금에 연계하는 방안이 재정부담이 적다고 하지만 기준 연도에 따라 다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기초연금법안을 입법예고하면서는 최소 수령액 10만원도 빼버렸다. 그러니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것 아닌가.
대학 반값 등록금, 고교 무상교육, 무상보육 등 복지공약과 지역공약 수정을 위해 박 대통령은 국민들 앞에 고개를 몇 번 더 숙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이런 조삼모사식 설명이라면 곤란하다.
다시 하워드 진의 책으로 돌아가보자.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무기와 돈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부라고 할지라도, 각성해서 들고 일어나는 시민들의 힘 앞에서는 그들의 권력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위정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대목이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