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9. 삶과 문화 : 소명과 자유] ② 존엄사
입력 2013-10-03 17:15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은혜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음 앞에서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은 찢어진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자들의 고민은 일반인보다 크다. 안락사에 대한 고민에다가 신앙적인 고민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인지 고민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에게 안락사는 여전히 어려운 주제다. 오늘은 동성애, 이혼, 낙태, 전쟁 등 기독교 윤리의 주제 중에서 안락사에 대해 대화하려고 한다.
연명치료의 중단
안락사와 연명치료는 분류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개념 차이가 있다. 적극적 안락사는 의료진 혹은 본인이 죽음의 원인을 직접 제공하는 경우다. 소극적 안락사는 정의가 다소 애매하다. 소극적 안락사는 회복불능의 환자에게 더 이상 인위적인 의학적 처치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말기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이나 산소 공급을 중단하는 경우다. 본 강좌에서는 소극적 안락사라는 용어를 피하고 유사한 용어인 ‘존엄사’와 ‘연명치료의 중단’을 동일 개념으로 사용하겠다.
필자는 적극적 안락사는 기독교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한다. 기독교계 안에서도 주된 논의는 존엄사를 허용할 것인지에 있다. 이미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논의가 많이 진행됐다. 일부 국가에서는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한국에서도 2013년 7월 31일 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정부안을 연내에 마련한다는 발표를 함으로써 법제화로 가는 마지막 단계에 있다.
오늘 강좌에서는 존엄사를 위한 법적 조치와 의료진의 실수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다루지 않는다. 법적 조치와 의료적 장치가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전제 위에 존엄사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차원을 보겠다. 즉 본 강좌는 존엄사에 대한 ‘신학적 타당성’ 여부에 집중한다.
삶과 죽음의 하나님
존엄사가 신앙적으로 고민이 되는 이유는 ‘생명’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존엄사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주장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렸다’ ‘인간은 생명에 대한 종결권이 없다’ ‘생명의 종결은 신에 대한 도전이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선언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존엄사에 대한 어떠한 신학적 대화도 어렵게 만든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는 종류의 주장은 옳은 말이다. 이 주장은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따라야 할 규범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일반성을 가지기는 하지만 존엄사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보편적인 적용을 강요하면 ‘율법주의’가 된다. 구체적인 대안 제시 없이 이러한 주장만 고집한다면 극단적 상황에서 구체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임종 환자와 가족의 고통, 기독교인 의료진의 신앙적 고민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주장이 될 것이다.
존엄사를 반대하는 주장의 핵심은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라는 것인데, 한 가지 주요한 점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지만 죽음의 주관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죽음도 하나님에게 속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죽음을 주관하고 있음을 다양하게 증언한다. 구약에서 죽음에 대한 대표적인 표현은 여호와에 의해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창25:8 등). 여호와는 에녹을 데려가시고(창5:24), 또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는 그 부름에 순종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고백한다. 그는 모든 인간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히9:27)이라고 선언한다. 즉 믿음의 조상들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고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 죽음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 도처에서 죽음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고 힘차게 증언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고, 죽음과 함께 인간은 새로운 형태로 하나님의 지배 속으로 들어간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은혜다.
죽음과 부활
존엄사에 대한 논의에서 간과된 것이 있다면 죽음과 부활을 분리해서 ‘죽음’만을 고려한다는 점이다. 타종교에 비해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부활에 있다. 죽음과 부활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부활을 통해 죽음의 의미가 기독교적으로 해석된다.
기독교는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죽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죽음이 최종적인 실체가 아니다. 만약 죽음을 최종적이고 죽음 이후에는 무로 돌아간다는 ‘죽음관’을 가지게 되면 당연히 모든 사람은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만 인식할 것이다. 이는 회복불능이 확실함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임종환자와 가족의 ‘의료집착’으로 나타날 수 있다.
임종환자와 가족에게 남은 시간은 대단히 소중하다. 이 시간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삶이라는 하나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부활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마지막 과정이다. 만약 임종환자와 가족이 기독교인이라면 그들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확고한 부활 신앙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순간이다. 부활의 소망 속에서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무장해야 할 때다.
만약 그들이 비기독교인이라면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부활신앙을 전해주고 그 힘으로 죽음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말씀을 기억한다면(롬14:8),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파하라는 선포를 기억한다면(딤후4:2), 죽음의 순간 구원받은 십자가상의 강도를 기억한다면(눅23: 43) 우리가 임종환자와 그 가족을 위해 마지막 남은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