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민수] 대의민주주의의 위기
입력 2013-10-02 18:19
추석 연휴 직전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는 불과 서너 시간 차를 두고 나란히 ‘국민적 저항’을 언급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17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야당이 장외투쟁을 고집하며 민생을 외면한다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오후 서울역에서 가진 추석 홍보전에서 “박 대통령의 불통정치가 계속 민주주의 회복을 거부한다면 심각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들이받았다. 그럼 국민들은 누구에게 ‘저항’을 해야 하나.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생각하는 국민은 따로 있는가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한동안 떠돌았다.
아전인수식 말싸움에 열 올려
대한민국의 대의(代議)민주주의가 위기다. 국회는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불과 1년4개월 전 자신들이 주도해 통과시킨 국회선진화법(일명 몸싸움방지법)이 위헌이니 수정하자는 목소리를 내는 새누리당은 대의정치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국회법 개정안은 여당의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통한 날치기와 야당의 본회의장 점거라는 추태를 더 이상 국민들에게 보이지 말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법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뜯어고치잔다. 정치권이 더 이상 쟁점을 타결할 협상 능력이 없다는 점을 자인한 꼴이다. 원내외 병행 투쟁이라는 ‘현실성’ 없는 전략을 들고 아직도 서울광장에 천막을 치고 있는 민주당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국회를 열어 놓고 당 대표는 버스를 타고 전국을 순회하고 있다.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국회에서 엉켜 싸움질하는 것도, 장외에서 맴도는 모습도 보기 싫다는 다수 여론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대선 공약(公約)이 뒤집혀 국민들의 속이 뒤집히는데도 국회의원들은 “지금 정권이 더 나쁘다”, “너희들이 집권했을 때는 공약을 바꾸지 않았느냐”는 말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의민주주가 갈수록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는 이유다.
아전인수(我田引水) 해석을 남발하는 정치인들이 들으면 화들짝 놀랄 만한 보고서를 최근 읽은 적이 있다. 지난해 발간된 ‘유엔 미래보고서 2030’은 2029년 기업 형태가 1인 기업으로 바뀌고, 1인 기업은 더욱 똑똑한 개인을 만들어 정치 혁신을 이끌면서 신(新)직접민주주의 시대를 열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울러 미래도시가 건설되면 국회와 정당 등 쓸모없는 대의민주주의가 없어지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사물인터넷을 이용해 직접민주주의가 실시되면서 주민참여 예산 제도가 마련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예측 보고서여서 이대로 가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2013년 여의도 정치권에 경종을 울리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청개구리처럼 국민들 뜻과 반대로 간다면 어느 순간 아예 금배지를 없애버리자는 여론이 봇물 터지듯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ICT기반 ‘숙의 민주주의’제안
이런 정치적 환경에서 노무현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과 교육부총리를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가 저서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숙의(熟議)민주주의를 제안한 것은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대의민주주의가 내재적 모순으로 민주주의 이념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으니 시민들이 공론을 모아 대의기구인 의회나 행정부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거나 보완하자는 것이다.
특히 근래 들어 SNS를 비롯한 정보통신기술(ICT)이 발달하면서 숙의 과정이 중계되고 결과가 집계되면서 ‘온라인 숙의’가 가능하다고 김 교수는 봤다. 미국의 경우 1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시민원탁회의가 열릴 정도라고 한다. 정치인들이 국민들과 계속 엇박자를 내는 동안 똑똑한 유권자들은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한민수 산업부장 ms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