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곽희문 (4) 예수 영접 1년만에 모든 것 내려놓고 케냐로

입력 2013-10-02 17:31


케냐를 잠시 방문한 것을 계기로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마음이 불타올랐다. 현장에 가면 마음이 돌아섰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케냐 사람들, 그 검은 얼굴들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국 NGO에서 합창단 관련 케냐지부장이란 직책을 주었다. 우리 가족은 예수 믿은 지 정확히 1년 만인 2008년 3월, 나이로비행 비행기에 올랐다.

숨 가쁘게 이어진 우리 가족의 삶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몰아가심’으로만 이해가 가능하다. 난 내가 걸어왔던 길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 초보인 내게 ‘선교사’란 딱지도 참 어색했다. 난 하나님이 만드신 속성 선교사였다. 힘든 결정과 판단을 빠르게 내리게 한 것은 나를 둘러싸는 포근함, 평안, 기쁨이었다. 그것은 인간이나 환경이 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잘되던 학원을 정리한 뒤 나온 물질을 아낌없이 나누었다. 그러고 훌훌 떠나는 모습에 어머님은 물론 형제들, 지인들 모두 놀라고 또 놀랐다. 정신이 확 돌아버린 것으로 이해를 했다. 모두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고, 딸 교육은 어떻게 시키며, 장래가 어떻게 될지 혀를 찼다. 그러나 그것을 염려했다면 난 케냐로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초보신자라도 그것을 초월했기에 비행기 안에서 태평스럽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나의 변화와 함께 아내 역시 동일한 변화를 겪은 것도 신기하다. 나나 아내 중 한 사람만 변화돼 상대를 물고 늘어지면 우리의 케냐행은 분명 물거품이 된다. 그런데 아내가 더 적극적이었다.

아내의 우상은 딸이었다. 남들보다 영민한 딸을 두었다고 확신한 아내는 상민이를 대한민국 상위 1% 리더로 키우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딸의 교육에 열과 성을 바쳤다. 그런데 그것을 내려놓고 더구나 그 소중한 딸을 데리고 케냐로 간다는 사실. 이것은 나 이상의 ‘내려놓음’이 있어야 가능했다.

케냐 생활이 시작됐다. 아프리카를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원시부족과 동물의 왕국을 연상하겠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것은 똑같다. 다만 삶의 질과 문화, 음식이 다를 뿐이다.

우리 가족은 자리를 잡고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내 업무는 현지 합창단 어린이들이 노래훈련을 잘 받고 해외공연을 잘하도록 스케줄을 짜고 돕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연스러움보다 인위적인 흐름에 ‘이건 아닌데’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 상황을 잘 극복하고 오히려 기도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와 딸을 울게 하고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쓰레기 더미 고로고초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쓰레기차가 오면 남보다 먼저 고르려고 벌떼처럼 사람이 모여든다. 이 가운데 먹을 만한 음식이 보이면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들어갔다. 쓰레기에서 줍고 먹고 이를 통해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은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아이러니였다. 특히 어린이들은 이 속에서 무엇이 신나고 즐거운지 깔깔거렸다. 난 그 천진한 웃음을 보며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이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 들어간다면 이들은 더 이상 불행한 아이들이 아니고 정말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지부장 1년 만에 나는 용단을 내렸다. 사표를 던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일은 준비하거나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래야 될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