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⑬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
입력 2013-10-02 17:11
4만명 한자리 결신… 여의도 축복이 이 땅의 부흥 원동력 됐다
“여러분이 앉아계신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는 분들은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스탠드 업! 일어서신 분들은 저희를 따라서 큰 음성으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내 죄에서 돌아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
1973년 6월 3일 주일 오후 서울 여의도광장. 광장에 모인 110만명 중 4만4000여명이 50대 미국인 목사의 요청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회개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 한국 전도대회’의 마지막 집회 순서였다.
◇4만여명 결신의 기적=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집회는 73년 5월 16일부터 전국 지방도시에서 시작됐다. 그레이엄 목사는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열린 여의도광장 집회만 인도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그레이엄 목사는 왼손을 들어올리며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외쳤다.
“예수님을 믿기로 한 여러분은 이제 네 가지를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첫째,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세요. 둘째,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시니까요. 셋째, 어느 누구에게나 전도하세요. 넷째,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십시오.”
전도집회 마지막 날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은 전달 30일부터 진행된 대회기간 전체 결신자(8만1842명)의 절반을 넘는 수준이었다. 그레이엄 목사는 열정적인 설교로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사람들에게도 큰 울림을 남기는 설교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인류의 역사를 가장 많이 변화시킨 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자기 일생 동안에 100여 마일을 가보지 못한 이 예수가 누구입니까 그는 33세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이 유일한 분은 누구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이 예수가 대체 어떤 분입니까.”
허리가 굽은 할머니와 지팡이를 든 할아버지,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린 엄마, 제복을 입은 학생과 군인 등 남녀노소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 효과를 극대화한 데는 통역을 맡은 김장환(극동방송 이사장) 목사의 역할도 컸다. 처음 통역 제의를 받은 고(故) 한경직 목사는 고사하면서 당시 39세의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던 김 목사를 추천했다.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는 대중집회의 포문을 연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그레이엄 목사, 한경직 목사의 인지도뿐 아니라 급격한 산업화·도시화에 따라 나타난 영적 갈급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성공적으로 치러진 전례를 찾기 어려운 뜨거운 집회”라고 설명했다.
◇허허벌판 여의도에 내려진 축복=집회 대회장을 맡았던 한 목사는 1970년 11월 그레이엄 목사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6·25전쟁 중 미군부대를 방문하기 위해 방한한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을 맡은 인연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한국에 영적인 갈급함이 있는 이때에 가능하다면 2주간 당신이 와주시기 바랍니다. 교파를 초월해 만장일치로 찬성했습니다. 그리스도 성령 안에서 오십시오.”
여러 차례 요청 끝에 그의 방한이 성사됐지만 집회 장소를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 허허벌판이던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이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모일 것인지 우려됐다. 당시 집회 준비위 측에서는 많아야 20만∼50만명이 모일 것이라고 예상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더라도 산만한 분위기 때문에 설교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효창공원 등 다른 장소가 후보에 올랐지만 준비위는 성경말씀에 의지해 여의도광장을 집회 장소로 정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우려와 달리 집회가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사람들로 가득 찬 광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특히 작곡자 고(故) 조지 비벌리 시어가 6000여명의 성가대와 함께 우리말로 부른 찬송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가 울려 퍼지면서 집회 분위기는 고조됐다.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 이후 여의도광장은 대형 집회의 장소로 자주 이용됐다. 당시 정부는 이례적으로 국가 행사에 주로 사용되던 여의도광장에서 집회를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사용료를 받지 않았으며 군악대까지 지원해줬다. 또 버스노선을 변경해 집회 장소 근처를 지나도록 해줬다. 이에 대해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운동 등을 편 개신교의 반정부적 여론을 달래려고 정부가 지원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