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고 그만! 귀만 빌려주세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김미성·양두환씨
입력 2013-10-01 17:18 수정 2013-10-02 00:41
올여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자녀들은 ‘엄마가 달라졌다’며 좋아하고, 직장 동료들은 ‘얼굴이 밝아졌다’며 부러워한다. 무더위가 시나브로 사그라지더니 어느새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던 지난주 수요일(9월 25일) 오후. 서울 시민청 광장 도란도란 카페에서 만난 김미성(43), 양두환(40)씨. 이들은 지난여름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마음을 도닥여 주는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 바로 지난 6월 15일부터 5주간 진행된 서울시의 힐링 프로젝트인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에 참가한 것. ‘엄마’ 프로젝트인데 왜 남성이 참여했느냐는 우문에 양씨는 “여기서 엄마란 언제든지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지지해주고 비난 대신 사랑을 퍼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별과는 관계없다”는 현답을 내놨다.
프로젝트는 4명이 한조가 되어 1주일에 한번씩 만나 저녁을 먹은 뒤 ‘내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날’ ‘기억에 남는 밥상’ ‘내 인생의 아리랑 고개’ 등을 주제로 돌아가면서 얘기하는 것이었다. 유명 강사가 나서서 쭉 강의하고, 듣는 사람들은 고개나 끄덕이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 규칙은 있었다. 1명이 얘기할 때 나머지 3명은 들어주고 느낌은 말하되 판단, 조언, 진단. 훈계 등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해고당한 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이들에게 상담치유를 권하는 활동가 김씨는 “다른 사람들이 내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자 마음 속 응어리가 스르르 풀리더라”면서 경청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활동가로서 자신의 장점을 알게 됐고, 엄마로서의 자신을 반성했단다. 평소 해고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그들의 얘기를 진득이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고. 하지만 고1, 초등 6학년 딸 둘의 말을 잘 들어 준다고 생각했으나 ‘경청’의 수준은 아니었다. 김씨는 “아이들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지레 짐작으로 아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 적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양씨는 “내 얘기를 안타까워 해주고 위로해주고, 도닥여 주고 싶어 하는 느낌을 받으니 안온해지더라”면서 공감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 초기에 매우 힘들었다고. 회사에서 재무업무를 맡고 있어 돈을 제대로 쓰는지 감사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조언하는 일이 그의 업무다. 몸에 밴 습관들을 금지 당해 힘들었던 그는 공감을 받으면서 차차 마음이 편해지더란다. 결국 충고보다는 공감을 해줘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아직은 동료나 자녀들과 얘기할 때 ‘아 내가 또 충고를 하고 있구나’ 자각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물론 이전에는 그런 자각조차 없었지만.
김씨는 “상대의 얘기를 경청하면서 이상하게도 내 속내를 말할 수 있게 됐다”며 신기해했다. 그동안 날선 칼날 위에 서있는 이들이 쏟아내는 넋두리를 들을 때 힘들어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했단다. 요즘은 ‘나를 믿어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구나’ 싶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오늘은 내가 힘드니 다음에 얘기하자”고 솔직히 말할 수 있게 됐다고.
양씨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흐뭇해했다. 요즘에는 예산집행이 잘못돼도 격한 반응은 자제하게 됐다고. 그는 “경상도 사투리에 목소리까지 큰 내가 화를 내면 사람들이 얼마나 주눅 들었겠느냐”며 자기반성을 했다.
이들은 요즘 프로젝트에서 배운 대로 참가자들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엄마 노릇’을 하기 위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잠실벌 나들이를 하고 있다. 힐링프로젝트 1차 참가자 24명은 2명이 한 팀이 되어 2차 프로젝트 참가자들을 이끌고 있는 것.
김씨는 “따라가기 힘들 만큼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서 마음을 놓치고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이 들었으면 좋겠다”면서 그동안 옆에 있었으나 보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씨는 “우선 내 아내부터 듣게 하고 싶다”고 했다.
이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생긴 의문 한 가지. 상대에 대한 애정이 담긴 조언과 충고를 왜 못하게 하는 것일까?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서울시정신보건사업지원단의 정혜신 단장은 “그 자체로 깊숙한 상처를 주게 마련인 충고 조언 판단 계몽 훈계 등을 멈추는 순간부터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면서 깊은 속 얘기, 묵은 상처 등 과거의 경험을 드러냈을 때 진심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졌다고 느끼는 순간 비로소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존재가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경험을 모든 이들에게 안겨주기 위해 시작한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내년 1월초 3차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관심이 있는 이들은 홈페이지(www.momproject.net)와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 ‘엄마가 필요해’ 방을 열심히 두드려 보자.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