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워싱턴서 일본이 다시 뛴다

입력 2013-10-01 17:36


지난해 소모임에서 만난 주미 일본대사관 소속 외교관은 워싱턴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털어놨다. 한국계 김용 세계은행 총재 발탁 등을 예로 들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 일본과 한국의 역할과 비중이 역전된 것 같다고 했다. 유엔 분담금 등 국제사회 지원에서 한국을 압도하는 일본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푸념했다.

미 의회에서도 위안부 등 역사문제에 대한 시대착오적 대응으로 일본은 궁지에 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확연히 달라졌다. 일본의 의회 로비, 싱크탱크 등을 통한 여론조성 작업이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중국과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는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 문제를 로비하기 위해 일본은 별도의 외교관을 미국에 파견해 운용했다고 한다. 2일 우드로윌슨센터의 ‘아시아·태평양의 리더십:일본과 미국’ 콘퍼런스 등 이번 주에만 워싱턴에서 일본 관련 강연회와 세미나가 4건이나 열린다. 2월 취임 후 첫 미·일 정상회담을 한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이 돌아왔다(Japan is back)”고 외쳤는데, 최소한 워싱턴에서 일본은 다시 돌아왔다.

일본도 미국과의 동맹에 사활적인 국익이 걸린 만큼 미 행정부와 의회, 여론에 영향을 주려는 노력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국익과 국가전략이 크게 엇갈리는 역사문제, 평화헌법 개정,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한반도 통일, 중국에 대한 대응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일본의 시각과 논리를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데 있다.

이미 일본의 보수 언론에서나 접할 수 있는 논조가 워싱턴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지난달 25일 헤리티지재단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반더빌트대학의 제임스 오워 교수는 “미국과 일본은 군사협력을 잘 하고 있으나 한국이 일본과 협력하지 않으려고 해 매우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미국뿐 아니라 중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한국을 비웃는 듯한 발언도 했다.

오워 교수가 이 대학 미·일 연구소장을 맡은 지일파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 7월 미국기업연구소(AEI)가 주최한 일본 에너지 안보 관련 세미나에서는 일본의 재무장을 도와 국제해역에서 일본의 책임을 확대해야 한다는 정책제안이 나왔다. 일본의 동남아와 인도양 등에서의 영향력 확대가 순조롭도록 미 정부는 일본과 동남아 역내 국가와의 양자 군사훈련은 물론 미군이 포함된 3자 군사훈련도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부상이 최우선 외교안보 과제인 미국에게 “우리는 중국에 대항해 양국간 협력을 하려는데 한국이 역사문제로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는 식의 일본측 주장이 먹혀들 소지는 충분하다. 일본의 노림수대로 친중국과 반중국의 편가르기 논리가 먹혀들 경우 최대 피해자는 한국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실제로 일본은 TPP가입을 놓고 한국이 미·중 간에 양다리 걸치기를 하고 있다는 불만을 미국에 제기했고, 우리 정부가 최근 ‘가입 검토’ 쪽으로 선회한 데는 이런 영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싱크탱크의 정책제안과 의회의 인식이 미국의 정책 방향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움직임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한·미동맹은 아시아 평화의 린치핀(linchpin·핵심축)’이라는 미국의 상찬(賞讚)에 취해 있는 사이 일본은 그동안의 열세를 단숨에 만회하려 하고 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