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라이벌 부재의 시대
입력 2013-10-01 17:30
“훌륭한 라이벌을 갖는 것보다 더 좋은 창조의 원천은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삼성전자가 세계 전자업계를 쥐락펴락하지만 1980년대만 하더라도 존재가 미미했다. 또 다른 재계의 거목인 LG의 그것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TV는 물론 세탁기, 냉장고 등 어느 것 하나 경쟁력 있는 상품이 없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삼성은 내심 당시 세계 전자시장을 주름잡던 소니(SONY)를 겨냥했다.
말단 신입사원부터 최고위층인 사장까지 앉으나 서나 오로지 소니를 따라잡을 방안을 찾는 데 몰두했다. 소니의 사원교육 교재까지도 수입해 그들의 성공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절치부심한 끝에 마침내 결실을 봤다. 국내 라이벌격인 대기업을 놔두고 소니를 잠재적 라이벌로 보고 노력한 결과다. 소니도 삼성의 추격에 자극받아 다양한 기법을 도입했지만 끝내 패하고 말았다.
한 편의 글을 위해 10번씩이나 다른 사람의 글을 읽었다는 원로 비평가 김윤식 선생이 최근 ‘라이벌 의식’이라는 역작을 냈다. 한국문학사를 관통하는 다섯 유형의 ‘라이벌 의식’이 자못 흥미진진하다. 압권은 역시 ‘문학과 지성’과 ‘창작과 비평’ 사이의 라이벌 의식과 스승 김동리를 넘어서고자 했던 이문구와 박상륭 이야기다. 작가들을 짓눌렀던 라이벌 의식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시대적인 고민을 안고 가며 보이지 않는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 것은 서로를 자극해 보다 차원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 어디 문학뿐이겠는가. 정치는 물론 스포츠에서도 때로는 도를 넘는 경쟁자에 대한 라이벌 의식의 발로는 보는 이를 진정한 환희와 감동의 세계로 몰고 간다. 따라서 ‘훌륭한 라이벌을 가진 것보다 더 좋은 창조의 원천은 없다(이택광)’는 명제는 언제나 진리다.
사실 겉으로는 단순한 경쟁 상대일 뿐이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서로의 고민을 나누는 라이벌은 역설적으로 한 몸처럼 느껴지는 동지이기도 하다. 가령 불멸의 투수로 이름을 날리다 유명을 달리한 최동원을 가장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이는 다름 아닌 당대의 라이벌 선동열 감독 아닐까. 최동원이 아직도 살아 프로야구 감독 자리에 있다면 선 감독의 성적은 지금보다 월등하게 좋았을 것이다.
이렇듯 라이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분야에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인구에 회자되는 빈도에서는 감히 정치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천하를 두고 패권을 겨룬 유방과 항우를 비롯해 ‘삼국지’의 여러 주인공들의 영웅담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백범 선생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옛말에 ‘미워하며 사랑한다’라는 표현이 여기에 딱 들어맞을 것이다. 단적인 사례는 모두 대통령을 지낸 DJ와 YS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정치판에서는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동지들의 수가 줄어 라이벌다운 라이벌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적어도 정치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라이벌이란 그 시대를 냉철하게 꿰뚫어 국민들의 염원을 속 시원하게 이뤄주는 경쟁을 하는 동종업계 간 싸움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상대방의 실수에 기대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얄팍한 상술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지만 이전 정치인들이 군부의 압제 속에서도 경쟁적으로 민주화를 외치며 국민들의 속을 뚫어준 것을 요즘 정치인들은 다 잊어버린 듯하다. 찬란한 민주화의 꽃을 피워낸 선배 정치인들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이뤄낸 민주사회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무슨 수를 사용해서라도 국회에 입성해 무한대에 가까운 권한만 행사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비친다.
민주화가 정착된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이 누리는 이런 환경은 과연 누구에 의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이 시대의 국민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선배들의 공적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여야 정치인끼리 진정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 정치문화의 스펙트럼을 더욱 확대시켰으면 좋겠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