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 60주년] 국군, 60년 만에 세계 5위 정예강군 성장

입력 2013-09-30 17:42 수정 2013-09-30 22:17


6·25전쟁 개전 초기 북한군 탱크의 위세에 눌렸던 한국군은 지난 60년간 자주국방 기치 아래 현대화와 방위산업 육성으로 세계 5위의 정예군으로 성장했다.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될 무렵 우리군은 60만명이었다. 전쟁 발발 무렵 한국군은 육·해·공군을 합쳐 병력은 10만여명, 보유하던 무기류도 장갑차 27대, 57㎜무반동총 140정, 2.36인치 로켓 960문, 낡은 소해정과 중고 전투함 1척, 훈련기 10여대에 불과했다. 3년간 전쟁을 거치면서 급성장한 셈이다.

한국군은 60년대 말까지 한반도 방위의 상당부분을 주한미군에 의존했다. 하지만 68년 1·21 청와대 기습미수사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등 북한 도발과 미국의 미온적인 대응을 계기로 한국군 현대화가 추진됐다. 71년 동두천에 주둔해온 미 7보병사단 2만명과 3개 공군비행대대가 철수하고 서부전선 비무장지대에 배치됐던 미 2사단이 동두천·의정부 등 후방으로 이동 배치되면서 155마일 휴전선 방어임무가 완전히 한국군에게 이양됐다.

우리 군이 쓸 무기를 생산하기 위한 방위산업 육성도 시작됐다. 70년대 초 육군 40개 사단 중 M-1 소총과 105㎜포 등의 장비를 갖춘 사단은 23개 불과했다. 3차례에 걸친 방위력개선사업(율곡사업)을 통해 세계에서 7번째로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는 등 방위산업은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주한미군 감축과 함께 한반도 방위에 대한 미군 역할이 점차 지원 방향으로 전환됐다. 이에 따라 우리군의 역할이 커졌다. 91년 3월 미군 장성이 맡아왔던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한국군 장성이 담당하게 됐다. 또 미2사단이 담당하던 판문점 내 유엔군 측 경계책임이 우리군으로 넘어왔으며 92년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미군병력이 한국군으로 대체됐다. 80년대 말부터는 작전통제권전환에 대한 협의가 시작돼 94년 12월 1일 평시 작전통제권이 넘어왔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새로운 전기로 제2의 창군”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미군인 한미연합사령관이 6개 항목의 연합권한위임사항(CODA)을 가져 자주국방에는 제한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2000년대 들어 한·미는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군으로의 전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2007년 양국은 2012년까지 전작권을 전환한다는 데 합의했으나 북한 위협으로 시기는 2015년 말로 조정됐다. 한·미는 2일 서울에서 열리는 제45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다시 한번 전작권 전환시기를 연기하는 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나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군사편찬연구소 장삼열 국방사 부장(예비역 대령)은 30일 “지난 60년은 한국군이 주한미군에 의존적이었던 상황에서 주도적인 위치로 전환되는 과정이었다”며 “이제는 우리 군이 보다 더 효과적으로 북한 위협을 관리할 수 있는 독자적인 능력을 갖추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