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재정의 덫] 空約가계부, 4개월 만에 다시 쓸 판
입력 2013-09-29 17:35
박근혜정부의 공약가계부가 발표 4개월 만에 ‘공약(空約)가계부’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향후 5년간 국정과제 추진을 위한 재정지원 실천계획으로 주목받았지만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어서다. 경기침체 등으로 세수 부족 사태를 겪으면서도 정부가 ‘증세 없는 복지’ 원칙을 고집해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존재감 없어지는 공약가계부=대표적인 사례는 사회간접자본(SOC) 분야 구조조정에 실패한 것이다.
정부가 지난 26일 발표한 ‘2014년 예산안’ 가운데 SOC 예산은 23조3000억원으로 올해(24조3000억원)에 비해 1조원(4.3%) 줄어드는 데 그쳤다. 정부가 지난 5월 말 공약가계부에서 세출 구조조정의 핵심 사례로 SOC 분야를 꼽은 것과는 반대되는 결과다.
당시 정부는 최근 몇 년간 경제위기 극복 과정에서 4대강 사업 등 SOC 예산이 집중 투자된 점을 고려해 대대적인 세출 절감을 예고했다. 하지만 내년 SOC 예산은 전임 이명박정부 시절 4대강 사업을 제외한 평균 SOC 예산(22조4000억원)보다도 높게 책정됐다.
정부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SOC 투자의 경기대응 효과라고 주장한다. 경기회복세가 더딘 상황에서 SOC 투자가 지역경제 활성화 등 ‘버팀목’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29일 “SOC가 경기를 본격적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하지만 각종 산업연관 효과를 고려할 때 경기가 추락하지 않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정사업비 가운데 세출절감 효과가 가장 클 것으로 봤던 SOC 투자 구조조정에 실패하면서 복지공약 이행은 한층 부담이 커졌다.
당장 교육 관련 공약은 이행시간표가 줄줄이 늦춰지고 있다. 고교 무상교육의 경우 공약가계부에서는 2017년까지 3조1000억원을 투입해 단계적으로 확대키로 했지만 내년 예산안에 반영되지 못했다. 정부는 ‘반값 등록금’도 재원 문제 때문에 시행 시기를 1년 더 미뤄 2015년부터 추진할 예정이다.
◇재원조달 방안 근본적 한계 노출=비과세·감면 혜택을 축소해 공약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계획 역시 공약가계부대로 진행되지 않을 전망이다.
내년도 정부예산안을 보면 국세감면액은 33조1694억원으로 올해(33조6272억원)보다 4578억원(1.38%)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약가계부에서 내년에 비과세·감면 정비로 확보하겠다고 한 1조8000억원에 한참 못 미치는 액수다. 정부는 비과세·감면 정비로 5년간 18조원을 조달해야 한다.
이는 ‘증세 없는 복지’ 원칙 하에 작성된 공약가계부가 시의성을 잃고 있다는 의미다. 세수 부족에다 비과세·감면 정비 등 정부의 재원조달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내년 경제성장률로 3.9%라는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면서도 재정적자가 25조9000억원이라고 예상한 것은 그만큼 재정 건전성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증세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여론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당초 제시한 재원조달 방안의 비현실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비과세·감면 정비나 지하경제 양성화 같은 재원조달 방안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서 복지 지출과 재정 여건에 부담을 주고 있다”며 “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