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찍었다 바람이 찍혔다… ‘소나무 작가’ 배병우 수십 년째 담아낸 제주도 ‘風景(Windscape)’展

입력 2013-09-29 17:12


“파도는 바람이 만드는 것인데 바람은 보지 못하고 파도만 봐왔다. 파도는 높이 솟구치면서도 결국에는 흩어지고 마는 것인데…. 나는 사람 얼굴을 숱하게 봤지만 시대를 보지 못한 것이다.” 화제의 영화 ‘관상’에서 주인공 송강호가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들려주는 대사다. 사진작가 배병우(63)의 바다 사진작품을 보면서 ‘관상’이 전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영국 출신 팝가수 엘튼 존이 2005년 소나무 사진을 구입하면서 ‘소나무 작가’로 유명해진 배병우는 사실 소나무보다 더 오래전부터 바다를 찍었다.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의 시선은 늘 바다를 향해 있었고, 사진작업을 시작하면서 그의 카메라도 자연스럽게 바다로 향했다. 홍익대 미대를 다닐 때부터 전국 곳곳의 섬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섬을 찾아다니다 제주도에 이른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째 제주도의 다양한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제주도에 다다랐을 때 다른 섬에서의 작업은 연습에 불과했고, 제주도가 모든 섬의 결정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제주의 바다를 찍은 작품으로 10월 1일부터 27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연다. 전시 제목은 ‘풍경(風景·Windscape)’.

‘풍경’은 영어로 ‘Landscape’다. 작가는 ‘바람 풍’의 의미를 살려 ‘Windscape’로 전시 제목을 정했다. 제주도의 바다 풍경이 가왕(歌王) 조용필의 노래처럼 ‘바람이 전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파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다 풍경을 만들어내는 바람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그 시대의 흐름에 초점을 맞췄다는 얘기다.

전시를 앞두고 지난 주말 만난 작가는 바람에 얽힌 추억을 들려줬다. “어릴 때부터 바람을 무척 좋아했어요. 기억에 가장 크게 남은 게 1959년 사라호 태풍인데 그땐 집들이 날려갈 정도로 무시무시했지요. 그런 와중에 저는 혼자 신이 났었어요. 무엇이든 가만히 있는 것보다 바람에 흔들려 움직일 때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내 작업도 바람 부는 한순간에 대한 이야기이고요.”

작가의 제주도 풍경은 크게 세 가지다. 한라산 주변의 기생화산이 만들어낸 여성스러운 굴곡을 담은 ‘오름 시리즈’, 사면을 둘러싼 바다를 담은 ‘바다 시리즈’, 오름 속 풀의 움직임을 표현한 ‘식물 시리즈’다. ‘식물 시리즈’는 김수영 시인의 ‘풀이 눕는다’를 연상케 한다. 작가는 “김수영 시인은 저의 이모부인데 나도 모르게 시적 감성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 싶다”고 털어놨다.

그의 사진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회화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비결은 줄곧 아날로그 필름을 고집해온 작업 방식에 있다. 그는 “디지털의 느낌이 아직은 싫다. 내 사진에서 느껴지는 수묵화의 동양적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디지털 방식이 맞지 않다”고 말했다. 전시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소나무 사진도 몇 점 나온다. 카메라로 그려내는 ‘빛의 수묵화’가 잔잔한 울림을 준다(02-720-102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