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볼리비아 전명진 선교사] 선교는 돈으로 하는게 아니다

입력 2013-09-29 17:03


“수고 많아, 이거 선교비에…”

대학캠퍼스 땅값·강의실 건축 고비마다 은혜의 손길


대학 운영에 필요한 좀더 넓은 공간을 놓고 기도하던 2007년 어느 날이었다. 신문을 보는데 시내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큰 집이 하나가 매물로 나온 사실을 알게 됐다. 8300평 부지와 건물이 있는 곳이었다. 주인은 자동차 수입상이었는데 연말에 급하게 막아야 할 돈이 생겨 개인 승마장으로 쓰던 곳을 매물로 내놓았다. 가격을 알아보고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는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서 투자자 가운데 90% 이상이 떠난 상황이었다. 매매가 잘 이뤄지지 않아 부동산 매물은 시간이 갈수록 쌓여갔다. 당연히 부동산 가격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 지역 땅값을 조사해 보니 ㎡당 30달러 정도였지만 매매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 땅을 팔려는 주인과 대화를 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주인은 세 번 이혼을 하면서 가정과 사업이 파산 직전까지 갔다가 크리스천인 지금의 네 번째 부인을 만나 가정과 사업에 안정을 이뤘다고 했다.

이때다 싶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건물을 교회와 대학 건물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나의 당찬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흔쾌히 “1㎡에 10달러에 팔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가격 조정이 됐고, 건물을 포함해 1㎡에 6달러, 총 30만 달러에 사기로 약속했다. 그 다음날 계약금 3만 달러를 마련해 계약부터 했다. 3만 달러면 당시 고급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일단 계약금을 건넸지만 우리 부부의 수중엔 아무것도 없었다. 30만 달러는 당시 우리에게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대학 캠퍼스를 사서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기쁘고 좋았지만 27만 달러라는 잔금을 생각하면 아찔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큰 꿈을 갖고 여기까지 달려오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일들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때 마침 선교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상황이었다.

“잠시 기다려보게. 선교사역하느라 수고가 많지. 자, 이것 선교비에 보태 쓰게.” 그리고 봉투를 하나 주셨다. 매년 선교대회 때마다 인사를 드렸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엉겁결에 받고 말았다. 나와서 봉투를 열어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1억원이 들어 있었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영적 스승이신 조 목사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인사를 드렸지 한번도 어렵다거나 학교 운영에 돈이 부족하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그런 상황을 미리 아시고 선교비를 마련해 주신 것이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남미 선교회에서, 그리고 미국의 친구 목사님 교회에서 헌금이 들어왔다. 또 전혀 알지 못하는 미국 분이 볼리비아를 방문하고 학교 이야기를 들은 뒤 10만 달러를 보내주셨다. 할렐루야! 결국 모든 잔금이 은혜 가운데 마련됐다.

이렇게 모험하듯 선교 사역을 펼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꿈, 비전, 열정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지난 28년간 선교 사역을 펼치면서 감사하게도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손을 내밀지 않았다. 모든 것에 부요하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갔으며, 영적 스승이신 조 목사님의 가르침에 따라 절대긍정, 절대희망의 4차원 영성 말씀을 붙들었다. 성령님을 믿고 사모하며 충만한 은혜로 사역에 임하라는 이영훈 목사님의 말씀대로 힘과 용기를 내 사역에 집중했다. 사실 모든 일이 이렇게 빨리 진행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분명 주님께서 계속 문을 열어가신다는 확신만큼은 있었다.

학교 부지를 구입한 뒤 과제는 강의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학교 부지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개인 승마장이라고 해봤자 비 오는 날 실내에서 승마 연습을 할 수 있는 낡은 건물, 10여 마리 말이 지내는 마구간이 전부였다.

생각을 바꿨다. ‘그래. 없는 것을 바라보지 말고 있는 것을 가지고 주님의 손 위에 얹어 놓자! 예배처소부터 만들자.’ 우선 승마 연습장으로 사용되던 대형 창고를 성전으로 리모델링했다. 길이가 75m, 폭이 22m였다.

인근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 장기적으로 대학교회로 부흥시키면 학교를 운영하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성도는 한 사람도 없었지만 1000석 규모로 짓기로 했다. 말씀대로 입을 넓게 열고 공사를 진행했다.

1차 목표는 영산신학교 졸업식을 이곳에서 개최하는 것이었다. 매년 내가 시무하는 한인교회에서 졸업예배를 드렸는데 200석 규모라 졸업생 가족들이 오면 늘 비좁아 불편함이 컸다. 그때가 8월인데 12월 졸업식까지는 3개월가량 시간이 있었다. 그때까지 완공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공사를 진행했다. 내가 공사장 인부인지 선교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3개월간 공사에 미친 듯 뛰어들었다.

인부는 건축 기술자 1명과 현지 지교회 성도, 교역자, 그리고 나를 포함해 30명이 전부였다. 하루 20시간씩 일을 하면서 졸업식 날짜에 맞추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주변에선 정신 나간 짓이라고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3개월 만에 1000석의 성전을 완공했다.

성전 완공을 앞두고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들이 많이 있었다. 당시 볼리비아 사역은 한인 성도 50명에 현지인 지교회 12개가 운영되는 상황이었다. 성도들의 경제적 형편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도들의 힘으로 의자를 한두 개씩 구입하자고 해서 한인교회와 현지인 교회들이 1000개의 의자를 목표로 세우고 의자 헌금을 했다. 나중에 보니 1450개의 의자 헌금이 들어왔고 어떤 성도는 300평이 넘는 바닥 타일을, 다른 성도는 천장공사 대금을, 또 다른 성도는 전등을 책임졌다. 창문 유리, 악기, 음향 등 모두가 이런 방법으로 채워졌다. 할렐루야!

성전 공사가 마무리된 후 성전 뒤편 창고를 개조해 실내체육관으로, 2층은 기숙사로 만들었다. 동네 주민들을 위한 진료실도 만들었다. 강의실이 없었기 때문에 말을 키우던 마구간을 2층으로 올려 리모델링했다. 그렇게 사무실과 강의실,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는데 얼마나 유용한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결국 강의실의 수용 능력에 한계를 느끼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볼리비아 목회자 세미나에 재정을 지원해 주셨던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 선교사님,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 마침 제가 브라질을 방문하니 그쪽으로 오시죠.” 그분을 만나뵙기 위해 나의 첫 사역지였던 브라질로 향했다.

“그동안 전 선교사님의 사역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금 학교 사역을 하면서 가장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당연히 강의실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대학 강의실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그 자리에서 거액의 수표를 끊어주셨다. 그 돈이 지금 대학교 캠퍼스에 600평의 강의실을 건축하게 된 ‘마중물’이 됐다. 지금은 600명 정도 학생이 공부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이 학교가 볼리비아에서, 아니 중남미에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베이스캠프가 되리라 믿는다.

전명진 선교사

● 전명진 선교사

-1957년생. 대한신학교, 볼리비아 순복음신학교, UNPI 졸업

-기하성 여의도순복음 소속, 1988년 2월 파송

-볼리비아 한국하나님의성회 법인 설립

-한인 및 현지인 목회자 재교육 사역, 볼리비아 영산신학교, 볼리비아 베데스다대, 고아원 운영, 인디언(과라니족) 새마을운동, 진료소 운영, 라디오 방송, 굿피플 어린이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