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호텔에 대한 야릇한 상상
입력 2013-09-29 18:34
“학습 환경이 저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관광호텔이 건립될 수 있도록 규제와 절차를 개선하겠다.” 지난 25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이같은 방침이 나오자 대한항공이 서울 종로구 송현동 옛 미국 대사관 직원숙소 부지에 지으려는 복합문화시설과 연결하는 풀이가 즉각 나왔다. 잡초 터가 7성급 호텔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다.
이곳은 부침이 심했다. 애초에 삼성그룹이 사서 미술관을 지으려다 여의치 않자 대한항공에 판 땅이다. 경복궁이라는 대형 문화재가 코앞에 있는 데다 풍문여고 덕성여중고 등 학교를 끼고 있어 건축 규제가 많았다. 그래서 새롭게 구상한 것이 관광호텔과 공연장, 갤러리를 갖춘 문화공간이었다. 그러나 ‘200m 안쪽에 학교가 있어 호텔을 지을 수 없다’는 학교보건법에 발목을 잡혔다.
대한항공은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였고 대법원에서 확정 패소판결을 받아 헌법소원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던 차에 경제 살리기라는 정부 정책에 힘입어 극적으로 기사회생했다. 당연히 논란이 따른다. 대기업에 대한 특혜 시비나 조선왕조의 흔적이 산재한 장소성을 부각하는 대목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호텔을 보는 시선의 고리타분함은 딱하기 그지없다.
학생들이 접근해선 안 되는 곳?
호텔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다분히 이중적이다. 우선 최고의 서비스 공간이란 인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항장 인천에 들어선 대불호텔이나 외교 현장이었던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 최초의 상용 호텔인 반도호텔이 그렇게 출발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때 조선호텔을 집무실로 사용했고, 남북 정상회담이나 이산가족 상봉 같은 대형 이벤트는 워커힐에서 이루어졌다. 지금도 중요 국제 콘퍼런스가 호텔에서 열린다.
호텔을 불량한 곳으로 여기는 눈길은 음습하고 문란한 풍속의 현장으로 파악한다. 법원의 시각도 비슷하다. ‘사춘기 애들의 건전한 정서를 해치고 호기심 많은 그들의 상상을 부추겨 교육적인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청은 판례보다 한술 더 떠 ‘투숙객과 어린 학생들이 마주칠 수 있다’고 반대했다.
과연 그런가. 러브호텔들의 문제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건 곁가지다. 좀더 정직해보자. 남녀 간의 육체적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어서 유해하다면 일반 가정집도 해롭다는 건가. 가족끼리 호텔 레스토랑에 온 학생들은 정서를 잔뜩 해친 상태에서 돌아갈까. 호텔 투숙객들은 아이들과 눈을 마주쳐서도 안 될 괴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 많은 호텔리어들은 다 유해업소 종사자인가.
‘풍속’ 아닌 ‘문화’ 관점으로 봐야
다행히 최근에는 이런 고리타분한 인식을 깨뜨린 판결이 나오고 있다. 이달 초 서울행정법원은 “유흥업소 등 유해시설이 없는 비즈니스호텔은 학습과 학교보건위생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학교 앞 81m 거리에 이뤄지는 관광호텔 건축을 용인했다. 유흥이 유죄이지 호텔이나 숙박 자체는 무죄라는 것이다. 학교가 그렇듯 호텔도 도시를 구성하는 소중한 주체로 파악한 결과다.
대한항공이 제시한 청사진을 보면 학교 쪽에는 공연장과 갤러리, 율곡로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변에는 국제회의장을 배치하고 호텔은 건물 한가운데로 깊숙이 숨겼다. 이런 설계안을 보고도 교육적 가치 운운하며 숙박업소를 기피한다면 모순이다. 괜히 어두운 곳에서 못된 짓 하다 지레 얼굴이 붉어진 꼴이나 다름없다. 호텔도 이제 풍속이 아니라 문화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물론 대한항공의 잘 그려진 조감도는 재판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트릭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건축 계획을 바꾼다면 시민사회의 강력한 비난에 직면할 터다. 그래서 당부하건대 호텔을 세우더라도 공공성을 좀더 고민했으면 한다. 1만평 넘는 도심의 땅은 서울에서도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의미가 각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손수호(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