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염운옥] ‘무티’ 메르켈의 축배

입력 2013-09-29 18:50


‘무티(엄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애칭이다. 메르켈은 지난 22일 총선에서 3선에 성공했다. 이번 선거는 정책과 정당보다는 메르켈 개인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선거였고, 기민·기사당은 기대 이상의 결과를 거두었다. ‘인물 선거’는 독일 역사상 유례없는 경우였다. 선거공약집이 실종된 자리에 ‘안지(앙겔라)’의 커다란 얼굴사진과 손사진이 걸렸다. 이번 선거에서 기민·기사당은 41.5% 득표율로 2009년 총선보다 72석이나 늘어난 311석을 확보했다. 메르켈 총리가 치른 세 차례 총선 가운데 최고의 성적이다. 이번 총선의 최종 투표율(71.5%)이 예상을 깨고 2009년 총선 수준(70.8%)을 웃돈 것도 ‘메르켈 효과’란 분석이 많다. 경제위기, 긴축과 불안의 시대에 믿을 만한 데는 ‘따뜻하게 맞아주는 어머니’뿐이라는 선거 전략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5년 독일의 첫 여성 총리이자 첫 동독 출신 총리가 된 메르켈은 이번 총선 승리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11년 기록을 뛰어넘어 유럽 최장수 여성 총리가 된다. 하지만 집권 3기를 맞는 메르켈이 풀어야 할 과제는 만만치 않다. 축배를 들었던 손을 얼른 내려놓고 연정 협상에 착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단독정부 구성을 위한 과반 의석(316석)까지는 이르지 못한 탓에 차기 정부 출범에 앞서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에 나서야 한다. 기민·기사당 주도 연립정부의 단골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은 1948년 창당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정당 지지율 4.7%에 그쳤고,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중도 좌파인 사회민주당이 192석으로 원내 제2당에 올랐고, 좌파당과 녹색당도 2009년 총선 때보다는 줄었으나 각각 64석과 63석을 기록했다. 이들 3개 정당의 의석을 합하면 과반인 319석에 이른다. 이런 구도에서 향후 연정구성 협상은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메르켈은 흔히 대처 전 총리와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남성 중심의 정치판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대조적인 리더십을 보였다. 대처가 ‘대안은 없다’를 외치는 강철의 여인이었다면 메르켈은 차분한 실용주의자, 따뜻한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다. 이번 재집권에 성공한 요인으로는 유로존 경제위기에 대한 성공적인 관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 스페인 등 파산 위기에 몰린 국가들에 대한 지나친 긴축정책은 비난을 샀지만 적어도 독일만은 위기관리에 성공했고, 평온했다. 하지만 유로존 경제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사실 실용주의는 집권 2기 유권자의 지지를 끌어냈고 이번 총선 성공의 밑거름이 된 힘이었다.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당은 사민당과 녹색당의 의제를 과감히 흡수해 당세를 확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탈원전 정책이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자 메르켈은 전격적으로 탈원전을 결정했다. 물리학 박사 출신에 원전 신봉자였기에 더욱 극적인 변신으로 비쳤다. 물론 탈원전 결정은 메르켈의 결단만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아래로부터 시민사회의 반핵운동을 재점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기민당·자유당 연정의 선거 참패를 가져왔다. 결국 정부는 원자력윤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2022년까지 핵발전소를 모두 폐쇄할 것을 공식 선언하게 이르렀다.

구 동독 출신인 메르켈이 좋아하는 음식은 솔량카(Solyanka)라고 한다. 솔량카는 구 동독시절 서민들이 즐겨먹던 러시아식 고기야채 수프다. 입맛이 쉽게 바뀌지 않듯 통일 후 20년이 넘었지만 동독 출신 주민이 느끼는 차별과 좌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총선 투표율이 예상보다 높은 70%를 넘었지만 많은 구 동독 출신 독일인들은 투표소에 가지 않았다. 이들의 정치 무관심은 대표 선출을 통해 무언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 무력함 때문일 것이다. 총선에서 ‘무티’를 전면에 내걸었던 메르켈. 이왕 ‘엄마’ 이미지를 내걸었다면 이제 진정한 통합을 위해 보편적 모성애의 비전에 충실해 보는 게 어떨까?

염운옥 (고려대 연구교수·역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