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의 정치학] 파란 재킷… 붉은 넥타이… 色을 보라, 정치가 보인다
입력 2013-09-28 04:00
요즘 민주당에서는 파란색 재킷을 입은 여성 의원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남성 의원들도 파란색 넥타이나 셔츠를 자주 입는다. 그런데 불과 몇 주 전까지 민주당에서는 녹색 재킷과 넥타이가 인기를 끌었다. 이달 초 당의 상징색이 녹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파란색이 상징색이던 한나라당 시절 푸른색 계통의 옷을 즐겨 있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지난해 초 상징색이 붉은색으로 바뀌면서 지금은 붉은 재킷이나 붉은 넥타이를 자주 매고 다닌다. 정치권에서 색깔은 정체성을 상징한다. 이념적 동질감을 확인시켜 지지자들을 규합해내기도 하고, 정치적 피아(彼我)를 식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백 마디 말보다 특정한 상징을 지닌 색깔 하나로 정치적 메시지를 더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이나 키르기스스탄의 튤립혁명, 튀니지의 재스민혁명 등 동유럽과 중동 지역의 민중혁명이 ‘색깔’을 통해 표출되는 것도 색이 가진 정치적 결집 효과 때문이다. ‘색이 곧 정치이고 정치가 색깔 그 자체’인 경우가 적지 않다.
◇색깔을 드러내는 자체가 ‘정치적 행위’=독일 녹색당은 당의 깃발과 배너가 온통 녹색이다. 당 홈페이지도 3분의 2 이상이 녹색으로 돼 있다. 녹색당은 환경 문제와 에너지 문제, 반전평화 운동, 인권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해 왔다. 때문에 독일 국민들은 길을 걷다 녹색을 내걸고 캠페인을 벌이는 장면이 있으면 자연스레 녹색당이나 녹색당이 주창해온 메시지를 연상한다. 색깔 자체가 정체성을 말해주고, 색깔을 드러내는 활동 자체가 정치적 행위임을 알 수 있는 사례다.
우리나라에선 지난 4·24 경기도 가평군수 보궐선거 때 ‘색의 정치’가 치열했다. 새누리당이 기초단체장을 공천하지 않기로 하면서 기호 1번이 없어지고, 노란색(녹색과 함께 노란색도 민주당을 상징하는 색) 옷을 입은 민주당 후보가 기호 2번이 됐다. 통합진보당도 후보를 내지 않아 3번 역시 공석이 됐고, 무소속 후보가 기호 4번부터 7번에 배정됐다. 그런데 무소속 후보가 전부 똑같은 빨간색 옷을 입고 유세를 펼쳤다. 자신이 새누리당 출신임을 알리는 동시에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이라 새누리당의 옷을 입고 다니면 박수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양당제가 뚜렷한 미국에서도 공화당과 민주당이 각각 빨간색과 파란색을 내세워 캠페인 및 후보의 통일성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유명하다. 이념적으로 모호한 사람을 일컫는 회색분자라는 말도, 결국은 어느 한쪽의 ‘색’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제기된 비판적 용어다. 새누리당이 지난해 상징색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꿀 때 영남권 의원들이 “빨간색은 공산당 색깔이 아니냐”며 반대한 것도 당의 정체성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아를 구분해내는 색의 중요성을 간과할 경우 낭패를 당하기 일쑤다. 2006년 제4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 때 그랬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웠는데, 강 전 장관이 보라색 정장과 스카프로 ‘보라 열풍’을 일으켰다. 그런데 당시 열린우리당 상징색은 노란색이어서 매치가 잘 안됐다는 평가가 많았다. 당시 서울 강북지역 기초단체장에 출마했던 민주당 관계자는 27일 “강 전 장관이 느닷없이 영입된 데다 보라색 캠페인을 펼치면서 야권 지지자들에게 동질성을 충분히 주지 못했다”면서 “시장 후보와 지자체장 후보가 한 덩어리처럼 보여 시너지 효과를 내야 했는데 오히려 차별 효과도 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치 지도자에게 색깔은 곧 메시지=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월 취임식 때 카키색(일명 국방색) 코트를 입어 눈길을 끌었다. 남성적인 색상을 통해 국가수반이면서 국군통수권자로서의 위엄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박 대통령이 이후 3월 8일 충남 계룡대의 3군 합동 장교 임관식과 같은 달 14일 경기도 용인시 경찰대 졸업식 때 카키색 옷을 입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전에 군복색 옷으로 ‘선군(先軍) 정치’를 강조하려 했고,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누런색 서민복으로 서민과 가까운 지도자임을 드러냈다. 남미의 좌파 지도자였던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생전에 빨간색 옷을 즐겨 입음으로써 ‘좌파’ 이미지를 강조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애국심이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흰색과 파랑, 빨강색 등 3색이 어우러진 성조기 문양의 넥타이를 즐겨 매곤 한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