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영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욕 탈출기

입력 2013-09-27 17:30

주후 384년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 시의 수사학 교수이자 황제를 대신하여 연설을 하는 궁전 웅변가로 임명받는다. 성공의 입구에 도달한 그는 좀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부유한 기독교인 소녀와 약혼했는데 이 결혼에 방해가 된 것은 16세 때부터 15년 동안 살아온 동거녀였다. 교회에서 만나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이 주신 선물)란 이름까지 지은 아들을 낳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잘 살아온 그녀였지만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방탕하거나 술에 취하지 말라

로마제국은 자유민과 신분이 낮은 여성의 결혼을 법적으로 금지하였고 또 어머니 모니카가 이 동거를 강력하게 반대해 정식결혼을 주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부가 어려서 합법적인 결혼 연령인 12세에 이르자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임시방편으로 또 다른 동거녀를 데리고 살았다. 현대의 도덕적인 관점으로 볼 때 그는 방탕아로 비난받지만 혼전동거와 사생아 출산이 만연했던 당시의 사회 기준에서는 윤리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새로운 직장 환경에 적응하면서 황제가 출석하는 교회를 나갔다.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바쁘게 두 해를 보냈을 즈음에 겉으로는 말짱한데 내면에는 깊은 어두움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고백록’에서 표현하기를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상태에서 마구 발버둥치는” 일이 수개월 동안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386년 7월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심하게 흐느껴 울며 자기 집 정원으로 나갔다. 그의 눈에는 비 오듯 눈물이 흘러내리고 입술은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내일, 또 내일입니까? 지금은 왜 아니랍니까? 왜 저는 이 순간을, 저의 더러운 생활의 마지막 순간으로 만들지 못합니까?”

‘더러운 생활’이라니. 누가 그를 더럽다고 비난했는가? 무엇이 그를 스스로 더럽다고 느끼게 했는가. 첫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밀라노에서 접한 플라톤의 책들과, 그리스도인이 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과의 만남이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최소한의 음식과 수면으로 사는 금욕가들이었고 이 철학은 정욕이 인간 영혼을 더럽히므로 억누르라고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가르침을 따라 육체적 감각을 멀리하고 영원한 진리와 불변의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짧은 순간의 체험도 가졌었지만 다시 쾌락에 빠져 낙심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또 한번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고향 친구 폰티치아누스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성 안토니의 생애’를 읽고 곧바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된 두 관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가 말하는 동안 주여, 당신은 나를 나 자신 안으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살피기가 싫어서 여태 내가 있던 내 등 뒤에서 나를 떼쳐서 바로 내 얼굴 앞에다 세워놓으셨습니다. 얼마나 추하고 이지러지고, 더럽고 때 끼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강하게 묶고 있던 욕망의 쇠사슬을 보았지만 수도사들과 같이 정욕과 그것을 푸는 습관을 버릴 힘이 없었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다. 그때 이웃집에서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집어라! 읽어라!(tolle, lege)”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소리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들었고, 즉시 집으로 가서 성경책을 펴들고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곳을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그는 더 읽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이 말씀을 읽고 난 찰나, 한 가닥 확실성의 빛이 내 마음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무명의 온갖 어두움이 스러져버렸나이다…당신은 나를 묶은 모든 밧줄에서 끊어 주셨사오니…내 영혼은 이제 탐욕에 못 견디고 진흙탕에 구르고 육욕에 쏠리던 모든 일을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오랫동안 그를 칭칭 감고 있던 정욕과 쾌락으로부터 한순간에 벗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씀의 능력이 이룬 신비체험이었다.

반성과 눈물의 기도

필자는 수년간 아우구스티누스를 배우는 학생들과 함께 이 구절을 읽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처럼 변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데 무슨 비결이 있는 것일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이 회심의 과정을 임신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 정욕의 쇠사슬을 끊는 이 자유는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수개월의 반성과 씨름, 눈물의 기도의 결과였다.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여 인생을 망가뜨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늘고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정욕과 그것을 푸는 습관 앞에 무력감을 느낀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 보자. 그는 이 회심의 체험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로 확신했다.

김진하 교수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