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박상순] 굶주림·질병 고통받는 사람들 복음의 세계로 인도한 ‘샛별’
입력 2013-09-27 17:30 수정 2013-09-27 19:45
잠비아 성경대학 학장 박상순 선교사
지난 6일 오전 아프리카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 중심부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모닝스타바이블칼리지. 330㎡(100평)는 족히 넘어 보이는 강의실. 말끔한 차림의 신학생 80여명이 성경 읽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읽고 있는 성경은 신명기 21∼22장. 학생들은 강의실 앞 교수 탁자 위에 놓인 성경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을 눈으로 따라 읽었다. 이들은 움직임 없이 간간이 ‘아멘’ 하며 반응했다. 단체로 성경을 읽는 모습은 예사롭지 않았다. 말씀의 권위에 학생 전체가 압도된 듯했다.
강의실 앞쪽에 앉은 한 동양인 여성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했다. 작은 체구에 성경을 든 이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학생처럼 성경 읽기에 몰입했다. 20분쯤 지났을까. 여성은 성경을 내려놓더니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첫 학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신학생의 특권입니다. 마음과 뜻을 다하여 성경을 읽읍시다.” 일어선 그의 키는 작았지만 영어는 분명했고 거침이 없었다.
박상순(69) 선교사. 이 성경대학의 설립자이자 학장이다. 신장은 142㎝에 불과했지만 180㎝가 넘는 검은 피부 학생들은 그 앞에서 어린아이였다. 실제로 학생들은 그녀를 ‘마마’로 불렀고 박 선교사와 함께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독신인 박 선교사는 2000년 이 학교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학생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
잠비아 선교사가 된 이유
박 선교사는 원래 한국에서 전도사로 일하며 장애인을 위한 특수목회를 했다. 1981년 총신대 여교역자 연수원 과정을 졸업한 그는 신학생 시절 서울 봉천동에 새힘장애인교회를 개척해 장애인을 돌봤다. 그러면서 갈월동에 있던 수도성경학교에서 성경교사로 일했고 예비 전도사를 길러냈다. 15년을 장애인과 함께 목회하면서 성경을 가르치던 그는 95년 나이 50세를 넘기면서 향후 사역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쉰이 넘으면서 후반기 인생을 생각하게 됐어요. 어떻게 살면 좋을까 기도했는데 선교에 대한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아프리카의 케냐와 탄자니아, 우간다로 선교여행을 떠났고 거기서 선교사로 살아야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선교사로 나가려는 결심을 굳힌 것은 당시 탄자니아 한센병 환자촌을 가면서다. 열악한 환경 속에 방치된 환자들이 너무 불쌍했다. “점심을 먹긴 하는데 위생은 말할 것도 없고 형편없는 식단을 보고 하루라도 빨리 선교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선교여행을 마친 박 선교사는 그 길로 교회와 성경학교 일을 정리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선교훈련을 받았고 이듬해엔 영국으로 건너가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그때 나이가 52세였다. 당시 박 선교사의 영어는 중학교 2학년 수준. 죽을 각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언어학교와 에든버러 노섬브리아 바이블칼리지에서의 2년은 혹독했다.
“정말 죽어라 영어공부에 매달렸어요. 영어가 안 되면 선교도 못한다고 생각하고 하루 종일 헤드폰을 귀에 끼고 다녔어요. 틈만 나면 시장 가서 연습한 기억이 아직도 새롭네요.” 당시 언어학교 관계자들은 다른 학생들을 향해 “이 사람처럼 공부하면 영어는 다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의 첫 선교지는 케냐였다. 98년 현지 교단에 소속돼 스와힐리어를 배웠다. 취업 비자를 신청하고 기다렸지만 비자 발급은 늦어졌다. 그때 비자 문제 때문에 잠시 잠비아를 방문했는데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친구 선교사가 박 선교사에게 성경을 가르쳐보라고 시간을 주었다.
“케냐와 달리 잠비아 아이들은 성경 배우기를 좋아했어요.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였어요. 선교사들이 와서 뭘 해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잠비아의 미래는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데 달려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 대답에 감동이 되어 선교지를 바꾸게 됐지요.”
바른 신학교육 위해 성경학교 세워
잠비아로 옮긴 박 선교사는 학교를 세웠다. 학교 운영과 성경 교수는 그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스펀지처럼 말씀을 흡수하는 잠비아 학생들의 성경 사랑에 응답해야 했다. 바른 말씀 교육이 시급한 잠비아 교계 상황도 신학교 설립의 주된 이유였다.
“잠비아는 기독교가 강하지만 이단이 성행합니다. 목사 80%가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고요. 그러다보니 성경에서 벗어난 설교가 많습니다. 이른바 ‘번영신학’의 영향으로 예수 믿으면 좋은 자동차나 집이 생긴다는 가르침이 확산돼 있습니다.”
잠비아는 91년 기독교를 국가의 공식종교로 채택했다. ‘세계기도정보’(2010)에 따르면 인구의 86.9%가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의 신학교육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대부분 목회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시작하고 있지만 성경 이해가 부족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목회자는 잠비아에서 지위가 높은 계층으로 분류되면서 존경을 받으려는 경향이 많아졌다. 목사를 나타내는 명칭도 여러 개다. 일반 목사는 패스터(pastor)로 부르고 그 다음이 레버런드(reverend), 비숍(bishop), 어파슬(사도·apostle)이라는 말로 구분돼 있으며 최고 권위를 가진 목사는 프로펫(선지자·prophet)으로 불린다. 성경대학 설립자에 학장까지 겸하고 있는 박 선교사는 잠비아 교계에선 ‘프로페테스’(여선지자·prophetess)로 불린다.
“이곳 사람들이 저를 여선지자로 부르는 것은 그만큼 잠비아 사람들의 마음에 제가 그들의 미래를 알고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을 반영한다고 봐요.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어떻게 목사를 선지자나 사도로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64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잠비아는 남한의 7.5배에 달하는 대지에 국민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한다. 불규칙한 강우량으로 만성적 가뭄과 홍수가 반복돼 국민의 70%가 가난에 허덕인다. 인구 10%가 에이즈바이러스(HIV)에 감염돼 있으며 평균 수명은 40세에 불과하다. 암울한 삶의 지표는 기독교를 확산하는 계기는 됐지만 성숙은 그만큼 더디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잠비아의 열악한 영적 기상도는 모닝스타바이블칼리지와 같은 신학교육 기관이 얼마나 시급한지 보여준다. 모닝스타는 학사 과정을 운영하는 성경학교로 현재 114명의 학생들이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2006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147명이 졸업했다. 졸업생 80%가 잠비아 전역에 흩어져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짐바브웨와 말라위에서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배우는 게 더 많은 선교
모닝스타는 ‘샛별’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 말씀에서 따왔다. 이름대로 학교는 성장해 지금은 군소교단 출신 교회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많이 온다. 입소문을 타면서 육군이나 공군, 경찰에서도 학생들을 보내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정부로부터 군종과 원목, 경목을 배출하는 학교로 지정됐다. 졸업식에는 문화부 장관이 직접 참석하기도 한다.
박 선교사는 자신의 일이 행복하다고 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졸업한 목사들이 바르게 목회하는 것을 보는 건 즐거움이다. 1회 졸업생 중엔 루사카에서 500명 규모의 대형교회를 일군 목사도 있고 군목으로 간 졸업생이 진급하기도 했다. 졸업생들은 심심찮게 박 선교사를 찾아 문안한다. 용돈까지 쥐어주는 졸업생도 있다고 귀띔했다.
13년 선교활동에서 현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실수도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예배 때 춤도 추고 찬송도 오래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싫어서 시간을 줄이라 했어요. 하지만 다시 돌아가더라고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건 여기 문화였고 복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박 선교사는 오히려 배우는 게 많다고 말했다. 그는 잠비아인들의 심성이 착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이 사람들은 화를 안 내요. 그에 비해 저는 화를 잘 내고 소리도 지르는데 잠비아인들은 지금까지 화를 내는 걸 못 봤어요. 아프리카의 장점이겠지만 공동체 의식이 높아서 친척 간에도 서로 도우며 살아요.”
박 선교사는 학교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냉정과 지혜로 실행했다. 한국의 후원교회(노원창일교회)의 도움으로 20에이커(8만937㎡)의 땅을 구입한 다음 동네 사람을 불러 잡초 제거와 기초공사를 맡겼고 나중엔 일꾼 10명을 뽑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에게 기술을 배워 자격증을 따도록 했고 항상 음식과 적절한 대가를 지불했다. 무상 제공 대신 돈을 빌려주고 일하며 갚도록 했다. 월급은 저축하도록 했다. 직업이 없던 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줬고 자립할 수 있게 도왔다. 깊은 신뢰관계는 당연한 결과였다.
박 선교사는 모든 과정에서 일꾼들과 동역했고 학생들과 함께했다. 학생들이 아프면 지체하지 않고 병원에 보냈고 진찰료도 절반을 보탰다. 교직원과 학생 식사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제공했다. 학교 설립 초기에는 캠퍼스에 나무가 없었다. 단 2그루뿐이었다. 박 선교사는 손수 나무를 심었다. 잠비아의 대표적 나무인 플란보얀트. 호스를 끌고 다니며 물을 줬다. 그렇게 10년을 심고 가꾼 덕에 지금은 비교적 나무가 많은 캠퍼스가 됐다. 학교 곳곳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에 취침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는 독신이기에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교비 지출도 적고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게 독신 여선교사의 장점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래서인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도 했다. 학생들에게도 ‘나처럼 살라’고 당당히 말한다. 하지만 박 선교사는 “싱글 여성이 선교사가 된다면 가급적 결혼하고 오라고 말해주고 싶다”며 “그래도 혼자 살게 되면 시간과 능력을 허투루 쓰지 말고 주님을 위해 매진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설교와 강의 준비 시간 외에도 채소밭을 가꾸고 염소를 돌보며 요리도 직접 한다. 부지런한 덕분에(?) 아직 안식년 한 번 못 가졌다.
내년이면 70세. 교단(예장 합동) 파송 선교사로서는 정년이다. 하지만 선교는 계속한다는 생각이다. 요즘 또 다른 꿈이 생겼다. “잠비아에는 고등교육 기관이 적습니다. 뜻을 가진 분들이 고등학교를 세워도 좋겠습니다. 학생들에게 신학 이외에도 농업기술과 목축, 각종 기술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전문인 선교사들도 필요하고요.”
박 선교사는 현지인들에게 ‘뼈를 묻으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이 말은 외국인에겐 최고 존경의 표시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여기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잠비아 미래가 밝아 보인다.
루사카(잠비아)=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