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더불어 가라

입력 2013-09-26 18:23


“보수와 진보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다르지 않다.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이름 뒤에는 존칭이 붙지 않는 경우가 잦다. 그래도 명색이 대한민국 헌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인데 ‘○○○씨’는 언감생심이고 그냥 ‘이석기’로 불리곤 한다. 존대어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친한 친구 사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를 제외하고 제3자를 지칭할 때 존칭을 생략하는 경우는 대략 두 가지다. 역사적 인물이거나 차마 존칭을 붙이기 참담한 범죄자이거나. 현재를 살고 있는 이석기 의원이 역사적 인물일 리 없을 테니 그는 후자의 경우가 확실하다.

여론재판은 이 의원을 ‘시대착오적 종북주의자’로 판결했다. 이미 빨갱이로 낙인찍힌 그에게 헌법이 보장한 무죄추정 원칙은 애초부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이 밝힌 ‘RO 대화록’에 나타난 그의 발언들을 보면 그런 대접을 받아도 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보수 대 진보의 추는 한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민주화 이후 진보의 최대 위기라고 불릴 만큼 보수의 진격은 거칠 게 없어 보인다. ‘진보=종북’ 논리로 우리 사회에서 진보의 싹을 아예 도려낼 기세다.

좌(左)든 우(右)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공존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 해악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좌파를 용납하지 않았던 파시즘과 나치즘이 그랬고, 우파의 씨를 말리려던 중국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이념 논리는 개인을 파괴하고 사회를 황폐화시키는 광기로 흐르기 쉽다.

반세기 넘게 북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만의 특수한 상황에서 진보의 논리는 드물지 않게 북한의 그것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 과거 군사독재정권들은 툭하면 용공 올가미로 민주세력을 탄압했다. 이 여파로 그 시대를 경험한 세대들은 그렇지 않은 세대에 비해 진보를 반사적으로 빨갛게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북한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처벌하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진보 진영 전체를 싸잡아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위험하다. 우파도 전통 보수주의, 현대 보수주의, 급진적 우파, 극단적 우파 등으로 나눌 수 있듯이 좌파도 극단적 좌파인 공산주의부터 아나키즘, 사회주의, 민주사회주의,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일부 보수 진영은 옥석을 가리지 않고 여러 진보 진영의 이념과 논리를 이석기 의원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케케묵은 이념 틀에 갇혀 있다.

보수나 진보나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다르지 않다.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구현하는 과정의 방법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 가치관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하여 ‘보수는 좋고 진보는 나쁘다’거나 ‘진보는 옳고 보수는 틀리다’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좌와 우는 이 허황한 가설에 얽매여 사생결단을 하고 있다.

교학사 ‘고교 한국사’ 주 저자인 이명희 교수는 최근 새누리당 행사에서 “좌파가 교육계와 언론계의 70%, 예술계의 80%, 출판계의 90%, 학계의 60%, 연예계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현 국면이 유지되면 10년 내 한국사회가 구조적으로 전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답지 않게 이 주장을 뒷받침할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보수·중도·진보 성향 시민운동가들이 한국사회의 고질인 이념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공존을 넘어 성숙한 협력의 길을 모색한 적이 있다. 그 결과물이 ‘시민단체 활동가 그룹 행동강령’이다. 법질서를 존중하고, 색깔시비와 낙인찍기를 자제하며, 좌우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객관적 사실에 기반해 주장을 펼치자는 내용이다.

우리는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일본사회에 희망을 거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직시하며 ‘아베이즘’을 비판하고 제동을 거는 건전한 비판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좌우 날개의 균형이 맞아야 새가 높이 멀리 난다. 좌우의 견제와 균형이 조화를 이룰 때 사회가 건강하다. 보수와 진보는 적이 아니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