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관마저 탄복한 천재 문장가
입력 2013-09-26 17:12
‘소동파 평전’/왕수이자오/돌베개
중국 항저우에 가면 동파육(東坡肉)이라는 음식이 있다. 우리로 말하자면 돼지 족발 같은 돈육 찜이다. 중국 북송 당시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던 동파 소식(蘇軾·1037∼1101)이 항저우 지사로 부임했을 때 백성들과 더불어 즐겨먹던 음식이어서 동파육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동파육을 맛보았다고 해서 소동파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동파의 문학적 천재성은 그가 21세 되던 해,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해 합격했을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구양수가 그의 문장을 읽고 “모르는 사이에 진땀이 난다오. 기쁘고도 기쁘오! 이 늙은이는 길을 피해 그가 두각을 나타내도록 해 주어야겠소”라고 그의 장래를 축복한데서도 가늠할 수 있다.
소동파는 24세 때 쓴 ‘남행전집서’에서 이미 자신의 문학관을 드러낸다. “대체로 옛날에 글을 짓는 사람은 글을 짓는 데 능한 것을 훌륭하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짓지 않을 수 없게 된 다음에 지은 글을 훌륭하다고 여겼다. 산천에 구름과 안개가 있고, 초목에 꽃과 열매가 있는 것은, 충만하여 안에 꽉 들어찼다가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35쪽)
이런 문학관은 당대의 저명한 고문 작가였던 아버지 소순(蘇洵)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다. 고려의 문인들은 소동파를 숭상해 “과거 급제자의 방이 나붙을 때마다 33인의 동파가 나왔구나”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소동파 자신의 고려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고려인들이 조공을 바치고 하사받은 물건의 태반이 거란에 넘어가는 반면 고려인들이 바치는 물품들은 쓸 데가 없어 결과적으로 송나라만 손해를 본다는 진언을 왕에게 올릴 만큼 소동파는 국수주의자였다.
소동파에 관한 이런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저자인 왕수이자오 푸단대 중문과 수석교수는 “동파는 확실히 편파적인 면이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문화 교류 측면에서는 시종 우호적이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연대기적 서술에 소동파가 남긴 시문을 배치함으로써 서정성을 한껏 끌어올린 평전이다. 조규백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