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허구라지만… 가벼운 작가 향해 울리는 경종

입력 2013-09-26 17:14


신승철 두 번째 창작집 ‘태양컴퍼스’

소설가 신승철(48)이 두 번째 창작집 ‘태양컴퍼스’(북인)를 냈다. 생업에 쫓긴 나머지 8년 만에 묶었다지만 9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고른 수준을 선보인다.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산초 판사의 소설론’이다.

“이름이… 김판사가 맞소? 기호태 회장이 그렇게 묻고는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띤다. 평생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늘 굳은 표정이더니 의외다. 그는 몇 달 전에 내가 제출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여다보고 있다. 예, 맞습니다. 나는 되도록 무심하게 대답한다.”

별명이 돈키호테인 기호태 회장이 자신의 자서전을 쓸 대필 작가 김판사를 면담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산초 판사의 소설론’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장르 파괴가 다반사로 이뤄지고 있는 우리 시대에 소설 원론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 단편에 따르면 모든 작가는 대필 작가이다. 이런 명제가 성립되는 건 자서전을 쓴다는 조건 하에서조차 작가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대필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성공한 기업인인 돈키호테 회장의 자서전을 쓰는 김판사의 작업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대필임은 자명하다. 여기서 소설 원론에 대한 고민은 시작된다.

돈키호테 회장은 김판사의 작품을 대충 훑어봤다면서 “소설을 잘 썼다기보다는 잘 만들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네”라면서 기왕 대필할 바에야 “잘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다. 김판사는 이렇게 대꾸한다. “잘 만들어졌다는 표현은 제게 모욕입니다.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닙니다. (중략) 모든 일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이는 작가로서 세속의 길을 가지 않겠다는 신승철 자신의 의지를 반영한다. 이런 작가적 결기는 눈 내리는 어느 날, 함민복 시인이 산다는 강화도를 찾아가는 세 작가의 여정을 담은 ‘시인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서도 반복된다. “‘몽혼불도홍진기(夢魂不道紅塵棄)’라 했거늘, 꿈길에서도 세속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뜻이도다. 작가라고 셋이나 모였는데 세속에 물든 허섭스레기에 오물덩어리들만 득실하네.”

이 대목은 ‘산초 판사의 소설론’의 김판사가 돈키호테 회장에게 “셰익스피어의 이야기 구조는 36가지였다고 하더군요. 후세는 37번째 이야기 구조를 찾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라고 들려주는 대목과 맞물리면서 작가라면 의당 새로운 이야기 구조를 찾아나서야 한다는 신승철 자신의 소설론으로 변신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그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중략) 제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 것은 추수가 끝난 곳에서 낟알을 줍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 짓은 죽어도 못하겠습니다.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이상입니다.”(‘산초 판사의 소설론’)

소설은 확실히 허구의 산물이자 세속적인 장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키호테 회장의 요구처럼 허구를 또 다시 가공해 주문생산을 하면서까지 소설을 쓰고 싶지 않다는 신승철의 결기어린 자존심은 출판 자본과 결탁해 글을 쓰는 이 시대의 민첩하고도 가벼운 작가들을 향해 울리는 하나의 경종이다.

소설집 뒤에 붙는 평론가의 해설 대신 작가 자신이 쓴 ‘독자와의 대담’도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 문학평론가들은 너무 바쁘다. 해설을 청탁하면 원고를 받기까지 짧으면 3개월에서 길면 1년도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내가 출판사에 독자와의 대담을 싣고 싶다고 제안했다.” 괜한 너스레가 아니지 않은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