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오늘날 도시는 이들 손 끝에서 창조됐다
입력 2013-09-26 17:29
현대건축을 바꾼 두 거장/천장환/시공아트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한마디로 그는 괴짜였다. 말년에 한 텔레비전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사회자가 “15년만 더 일할 수 있다면 이 나라(미국)를 통째로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인가요”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실이에요. 내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멋진 일이지요.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입니다.”
건축주에게 자신의 경력을 부풀려 말하기도 했으며, 한때 조수였던 사람에게 있지도 않은 특허권을 거짓말로 팔아먹었던 사람. 또한 첫 번째 아내와 6명의 자식을 버려둔 채 새 연인과 유럽으로 도망갔고 그 뒤로도 여러 스캔들 끝에 세 번째 결혼에 이르러서야 안정을 찾았던 사람. 그러나 누구도 그의 건축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건축은 한마디로 주변의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건축, 즉 유기적 건축으로 요약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건축가협회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 건축’으로 선정한 낙수장(Fallingwater)이다. 낙수장은 라이트가 설립한 탤리에신 펠로십에 참가했던 한 실습생의 아버지로부터 의뢰받은 것. 의뢰인은 베어 런이라는 폭포 옆에 별장을 지어 달라고 했지만 라이트는 폭포가 쏟아지는 바위 위에 낙수장을 세웠다. 낙수장은 ‘대지에서 자라 나온 건축’을 지향한 유기적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말년의 역작이자 많은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킨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완공까지 16년이나 걸린 프로젝트다. 초기의 의뢰인이었던 솔로몬 구겐하임이 죽고 담당자마저 바뀌면서 설계안 내용이 몇 차례나 뒤집혔지만, 계단을 대신한 나선형 램프만은 계속 살아남았다. 이 나선형 램프 덕분에 내부는 유기적이고 명상적인 공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
# 미스 반 데어 로에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스는 독일 아헨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석공 일을 도우며 자란 성장 시절부터 재료의 소중함과 가치에 일찍 눈떴다. 10세에 학교에 입학하지만 3년 만에 그만 둔다. 이게 그가 받은 정규교육의 전부였다. 그 뒤 공사현장에서 벽돌 놓는 일을 시작으로 근처 설계사무소에서 조수로 일할 기회를 잡는다.
벽돌에서 출발한 그가 1937년 미국으로 건너가 훗날 뉴욕에 유리와 철을 사용한 시그램 빌딩을 설계한 것은 건축 재료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건물 내부의 흐름을 중시한 초기 설계에서 벗어나 흐름 자체도 없애버리고 아예 하나의 통째로 된 공간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그것을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구획하도록 하는 이른바 ‘유니버셜 스페이스(무한정의 공간)’로 요약된다. 1969년 건축가 김중업이 서울 청계천 2가에 지은 삼일빌딩도 시그램 빌딩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시그램 빌딩은 유리와 철로 된 형태의 건물들이 향후 도시의 풍경이 돼야 한다는 미스의 미래 철학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의 사후엔 “너무 획일화된 건축이어서 자본주의의 입맛에 맞는 모더니즘만 살아남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오늘날 시그램 빌딩을 본뜬 건물들이 들어찬 도시의 풍경이 바뀌려면 또 다른 거장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저자는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