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원’ 이준익 감독 “촬영 내내 울었지만 고통 속 희망도 함께 담았죠”
입력 2013-09-25 17:36
‘황산벌’(2003) ‘왕의 남자’(2005) ‘라디오 스타’(2006) 등 흥행작을 연출한 이준익(54) 감독은 ‘평양성’(2011)의 흥행 실패 이후 상업영화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만들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이야기가 있을 때 돌아오겠다”며 메가폰을 놓았다. 2년 동안 여행을 하며 세월을 보내던 그는 지난 4월 신작 ‘소원’으로 촬영현장에 컴백했다. 무엇이 그를 되돌아오게 했을까.
25일 서울 사간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유머 있게 받아넘기는 입담꾼인 그는 무척 말을 아꼈다. 복귀에 대한 소감을 묻자 “훌륭한 시나리오를 만나게 돼서 아무런 기획이나 준비 없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다”고 답했다. “이전 것은 다 버리려고 애썼어요. 그동안 흥행에 안달을 내고 그랬는데 다 지우고 맑은 마음으로 복귀하게 된 거예요.”
‘소원’은 동네 아저씨로부터 끔찍한 성폭행을 당한 아이 소원(이레)이 엄마(엄지원) 아빠(설경구)와 함께 서로 보듬으며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감독은 “민감한 이야기라서 함부로 말하기가 어렵다”며 “아동성폭행 사건이 조사된 것만 하루에 3∼4건이라는데 숨겨진 것까지 치면 얼마나 많겠느냐.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초 시나리오를 접한 그는 처음엔 영화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 “성폭행 장면에서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어요. 한참을 덮어두고 다시 읽고 또 덮어두고 다시 읽으면서 ‘흥행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내용의 가치로 판단하자’고 생각했어요. 범인에 대한 처벌이나 복수가 아니라 피해자 가족들의 따스한 희망을 그려보자, 이런 영화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작정했지요.”
먼저 설경구에게 출연을 제안했다. “‘라디오 스타’ 같은 영화 찍으실 거죠?”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엄지원 캐스팅도 별 문제가 없었다. 주인공 소원을 맡을 아역 배우를 찾는 게 힘들었다. “수차례 오디션을 봤지만 찾지 못하고 연기학원에 등록한 이레(7)양을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특별히 연기지도를 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게 좋았어요.”
자칫 진부할 수도 있고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감독 특유의 유머 감각과 노련한 연출 솜씨로 감정을 불어넣었다. “촬영 중에 페이스북에 누군가 탈무드 한 구절을 올렸어요. ‘잘 살아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라는 구절인데 가슴에 와 닿더군요. 피해자가 상처를 이겨낼 것인가, 상처에 무릎 꿇을 것인가. 잘 사는 것보다 더 큰 복수가 어디 있겠어요?”
사건 이후 말을 잃고 사람들을 기피하는 소원이가 일상생활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가족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영화를 찍는 내내 그 역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찍으면서 정말 그렇게 많이 운 적이 없어요. 인터뷰 도중에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정이 올라와요. 엄지원도 울고 설경구도 울고 스태프도 울고…. 하지만 울면서 웃는 영화, 웃으면서 눈물이 나는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흥행 욕심은 버렸다지만 신작을 내놓고 신경 쓰지 않는 감독이 있을까. “이런 소재를 팔아먹는다는 얘길 들을까봐 현실과 관련한 이야기는 영화 밖에서 절대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어요. 소원이가 성폭행당하는 장면은 아예 찍지도 않고 상징적으로만 처리했고요. 공손하고 정중하게 찍으려고 매 순간 노력했습니다. 그런 마당에 흥행 얘기를 하면 불손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소원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코코몽’을 통해 아빠와 딸의 관계가 회복되는 장면이다. 이는 ‘7번방의 선물’ 마지막 장면처럼 영화를 판타지로 만들어준다. “소원이가 굉장히 힘들고 피하고 싶은데, 코코몽이 등장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지죠. 코코몽이 공감을 못 얻으면 이야기가 완전히 무너지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해요.”
그는 아역 배우인 이레양의 연기를 극찬했다. “이 아이를 보면서 많은 걸 느꼈습니다. 인간의 교육이란 것이 본래의 잠재력을 억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죠. 대사와 상황만 주고 애가 하는 대로 봤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크게 계산하지 않고 반응하면 그것이 진실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이레는 올해 가장 강력한 여우주연상 후보입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