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보이’ 김장환 목사 인생역전 이끈 칼 파워스 상사 별세
입력 2013-09-25 17:34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나의 은인입니다.”
김장환(79·극동방송 이사장) 목사가 사석이든, 공식 석상에서든 그의 인생 얘기를 꺼낼 때마다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칼 파워스(미국) 상사. 1950년 6·25 전쟁 참전용사인 파워스 상사는 ‘하우스보이’ 신분으로 당시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김장환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줬다. 김 목사는 그의 도움으로 공부할 수 있었고, 목사가 될 수 있었다.
김 목사의 ‘인생 역전’을 이끈 파워스 상사가 지난 21일 미국 테네시주 브리스톤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파워스 상사의 별세 소식을 듣고 급히 현지로 향한 김 목사는 25일 열린 장례예배 집례를 맡았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초 경북 경산의 미군 캠프에서 이뤄졌다. 집을 떠나 홀로 미군부대에서 잡일을 보던 김장환은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하모니카를 불고 있을 때 파워스 상사가 다가와 한마디를 던졌다.
“너, 미국에 가고 싶니?” “예스.”
그 뒤 파워스 상사는 부대 이동으로 김장환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김장환의 어머니로부터도 정식 허락을 받았다. 1951년 11월12일 당시 17세였던 김장환은 파워스 상사가 마련해준 408달러짜리 배표를 들고 미국에서 부산으로 보급품을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배에 탔다. 파워스 상사는 근무연장 기간이 1개월이나 더 남아 홀로 떠나야 했다.
파워스 상사는 부자가 아니었다. 미국 아팔레치아 산맥의 한 탄광촌에서 태어난 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난 때문에 한국전쟁 참전을 지원한 것이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사립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살면서도 생면부지의 소년 김장환을 명문 사립인 밥 존스 고등학교 및 대학교에 이어 대학원까지 무려 8년동안 학비를 대줬다. 미션스쿨이던 밥 존스 고등학교에서 김장환은 신앙과 믿음을 갖게 됐다. 그 뒤 신앙이 없던 파워스 상사도 김장환의 전도로 크리스천이 됐다.
1979년 성탄절, 파워스 상사와 함께 떠난 이스라엘 성지순례 길에서 김 목사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김 목사의 간증이나 집회, 각종 모임에서는 파워스 상사 얘기를 듣는 게 어렵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 2000년 김 목사는 제19대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에 취임하면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파워스 상사였다고 고백할 정도다. 그만큼 김 목사 인생에 있어서 파워스 상사는 헌신과 사랑의 표본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2년 전, 파워스 상사와 김 목사 자신 이름의 영문 첫 이니셜인 ‘P’와 ‘K’를 딴 PK장학재단을 설립한 그는 경제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면서 파워스 상사가 실천해온 헌신과 사랑의 사역을 대물림하고 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