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기수] 연명의료계획서를 씁시다
입력 2013-09-25 18:41
추석 연휴 첫날인 지난 18일 이른 아침, 휴대전화에서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는 신호다. K대병원에서 일하는 친구 K가 보낸 부고(訃告)였다. 중환자실에서 4개월 보름가량 특수연명치료를 받으며 간신히 숨만 쉬던 그의 부친이 그날 새벽 돌아가셨다고 한다.
명절 고향 나들이를 오후로 미루고 바로 조문을 간 내게 K는 대뜸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특별법이 빨리 만들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알고 보니 명절이 다가오면서 마음이 조급해진 K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부친의 주치의에게 이제 인공호흡기를 떼고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 있게 도와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는 “그건 살인행위에 해당된다. 법에서 금지하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좀 더 지켜보자”고만 하더란다.
급기야 K는 말은 못해도 큰 고통을 겪고 있을 부친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의사에게 서운한 마음까지 들더라고 털어놨다. 멋모르고(?) 말기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착용시켰다가 법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애타는 사람들이 어디 자기뿐이겠느냐는 것이다. 실제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허대석 교수팀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K의 부친처럼 말기에 심폐소생술을 받거나 인공호흡기 등 연명의료를 받다 숨지는 이들이 연간 3만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자기가 원해 연명의료를 받게 됐을까. 아니다. 허 교수는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가 연명의료에 대한 의사결정을 스스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의학적으로 극한 상황에서 인공호흡기 사용 등 연명의료를 유보 또는 중단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지 못해 가족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의사들이 방어적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소생 불능 상태에 빠졌을 때 쓸데없는 시술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환자 스스로 의사를 표명할 수 있을 때 의사와 협의해 무의미한 치료 중단 등에 관한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해 두는 것이 권장된다. 환자가 직접 의사를 밝히기 어려운 때는 가족과 의료진이 환자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고려해 역시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간혹 ‘수액주사 덕분에 한 달을 더 사셨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수액주사에 들어 있는 포도당 용액은 사실 스포츠 음료보다 조금 연한 미네랄워터에 불과하다는 것을. 한 달 동안 그 용액으로 생명을 연장한다는 건 마치 앞으로 물만 줄 것이니까 몸을 녹이면서라도 살아보라고 강요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당사자가 기뻐할지, 행복해할지, 고마워할지, 혹은 내가 그 입장이라면 과연 그런 식의 의미 없는 연명을 원하게 될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건강 전도사로 불린 고(故) 황수관 박사는 유언장을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생전 출연한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밝혔었다. 유언장에는 두 가지 소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의학연구를 위해 사후 자신의 시신을 의학도들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기증한다는 것과 말기 상황에서 인공호흡기 등 무의미한 연명의료 사용을 거부한다는 내용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끝을 기약하기 힘든 연명의료를 받다 고통 속의 죽음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호스피스완화의료를 통해 가족들의 축복 속에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나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겠다. 연명의료를 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것을 거부할 권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직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지난 7월 ‘모든 환자는 헌법정신에 따라 자신이 앓고 있는 상병의 상태 등을 분명하게 알고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기본원칙을 분명히 하고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특별법 제정을 정부 측에 권고했다. 보건복지부는 관련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