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을 전공한 나를 왜 정치로 이끄셨는지 의문을 푸는 날이 왔다. 변호사 3명이 찾아와 내가 관장하고 있는 소위원회에 상정될 한 법안의 숨은 함정에 대해 설명했다. 형식적으로는 특정 금융상품에 유례없이 과도한 면세 혜택을 주는 법안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극히 위험한 불법음성자금의 국내 유입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조문은 간단했지만 내용은 복잡했기에 경제통이 아닌 정치인은 그 함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변호사들은 이 법안이 통과되면 대한민국을 전 세계 불법자금과 범죄의 온상으로 만들 위험이 크다는 미국 의회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고서 등 객관적 근거를 조목조목 제시했다. 정의가 물같이, 공법이 하수같이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를 뿌리부터 흔드는 법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문제는 이 법안을 청와대가 밀어붙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청와대는 이 법안의 함정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법안 통과를 압박하는 상대국과의 정상외교 성과에만 열중해 있었다. 여당 의석이 180석 가까운 국회에서 법안 통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순간 “국회의원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었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담당 장관을 찾아가 문제점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더니 이해했고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기로 해서 잘 마무리됐다.
해가 바뀌어 내가 다른 자리로 옮기고 장관도 바뀐 뒤 사건이 터졌다. 청와대가 밀어붙여 문제의 법안은 법안 통과의 다섯 관문 중 첫 관문을 순식간에 통과했다. 첫 관문을 통과하면 막기 어렵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관문은 26명이 표결하게 돼 있었다. 법안의 함정에 대해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지만 2명의 우군을 얻는 데 그쳤다. 일부 의원은 나와 의견이 달랐지만 일부 의원은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듣고 싶어 하지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청와대에 반기를 들고 싶어 하지 않는 의원들도 있었다. 몇몇 분은 “이 의원, 공천은 받아야지. 어떻게 하려고 그래”하며 걱정해 주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이 말씀을 묵상했다.
표결하는 날 아침까지 23대 3의 구도를 깨지 못했다. 다른 문제로 여야가 대치해 오전 10시에 개회돼야 할 회의가 미뤄지고 있었다. 텅 빈 회의장에 혼자 앉아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을지 지혜를 주십사 기도하는 가운데 이 법안에 반대하는 목사님들 생각이 났다. 전화했더니 마침 선교회 행사로 모여 있는데 금식을 선포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겠다며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를 도왔던 아론과 훌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하셨다. 회의는 저녁 8시30분쯤 속개됐는데 위원장은 9시까지 71개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재촉했다. 내가 문제의 법안에 대해 반대토론을 하겠다고 고집했더니 정회를 시키고는 옆방으로 불렀다. 옥신각신하다 뭘 들어주면 반대토론을 안 하겠느냐 해서 그 법안이 상정되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급히 합의돼 그 법안만 빼고 일괄 타결됐다.
대통령이 그날 저녁 9시 비행기로 문제의 법안 통과를 압박하는 나라를 방문하게 돼 있어 청와대가 그날 저녁 9시까지 법안을 꼭 통과시키라고 했다는 사실을 뒤에 언론 보도로 알게 됐다. 그런데 바로 그 법안만 빼고 통과되는 기막힌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날은 국회 회기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 다음달에는 국내외 정세로 국회가 공전됐다. 문제의 법안은 결국 폐기됐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
[역경의 열매] 이혜훈 (17) “청와대가 밀어붙인 법안을 이혜훈이 혼자서?”
입력 2013-09-25 1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