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짚던 70대 회원 패션쇼 무대 감동”

입력 2013-09-24 17:23 수정 2013-09-24 17:57


독일서 패션쇼 여는 구하주 뉴시니어라이프 회장

“호호”“하하”“까르르”

뉴시니어라이프 구하주 회장이 구부정한 여성의 몸 그림을 보여 주면서 “나이 들면 이런 몸이 된다”고 하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소년소녀들처럼 해맑게 웃는 이들은 시니어모델 교실 회원들. 이곳에선 50대면 젊은이 대접을 받는다. 60대가 대부분이고 70대, 80대 회원도 적지 않다.

추석연휴를 앞둔 지난 17일, 서울 삼성동 뉴시니어라이프 소연홀. 구 회장이 강의를 마치자 회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손을 덥석 잡는 이들 사이로 눈이라도 맞추고 싶어 까치발들을 했다. 이들은 구 회장이 “웃음과 꿈을 찾아준 은인”이라고 입을 모으자 구 회장은 손사래를 쳤다.

“시니어들은 딱딱한 껍질 속에 맛 좋고 영양 많은 알맹이를 가득 품고 있는 석류 같습니다. 저는 그 껍질을 깨주는 역할을 할 뿐인걸요. 외려 이분들께 감사합니다.”

구 회장은 오는 10월 50∼80대 남녀 시니어모델 45명과 함께 베를린 등 4개 도시 순회패션쇼에 나선다. 프랑크푸르트 한국총영사관과 재독 민간단체들의 초청을 받아 국제무대에 데뷔하게 된 것. 이들은 원피스, 드레스 등 양장 100벌과 우리나라 전통복식 50벌을 선보일 예정이다.

“모델 교실에 다니면서 우울증이 말끔히 나은 회원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지팡이를 짚고 찾아왔던 70대 회원은 3개월 뒤 패션쇼 무대에 섰습니다.”

구 회장은 시니어들의 모델 활동은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건강도 되찾아줘 행복한 인생 후반기를 살 수 있도록 돕는다고 강조했다. 그가 시니어패션쇼를 세상에 선보인 것은 2004년. 2003년 창업한 시니어들을 위한 복지용구 업체 ㈜‘웰프’의 뒤늦은 창립기념식에서였다. 이 소문이 광주에까지 퍼져 2005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개관식에서도 시니어패션쇼를 무대에 올렸다.

“패션쇼 무대를 보고는 배우자는 물론 자녀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시니어 모델들의 자신에 찬 모습, 밝은 웃음을 보고는 다른 사람 같다고 했어요.”

무대에 오른 시니어 모델들보다 가족들이 구 회장에게 더 고마워했다. 시니어패션쇼가 시니어들 치유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 구 회장은 2006년 대한노인회와 함께 실버모델선발대회를 열고, 30명을 뽑아 국제실버박람회에서 대규모 시니어패션쇼를 선보였다. 세상 사람들의 입에 시니어 패션쇼가 오르내리며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시니어 패션쇼란 새로운 패러다임을 성공시켰지만, 그 즈음 사실 사업은 완전히 망해가고 있었어요.”

구 회장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뒤 졸업하자마자 서울 명동에 의상실을 차려 크게 성공했던 패션 디자이너다. 영부인 코디네이터로 활동할 만큼 실력도 인정받았던 그가 실버산업에 손을 댄 것은 50대 초반 ‘사추기(思秋期)’를 톡톡히 앓은 덕분(?)이었다.

“의상실이 잘 되는 데도 ‘내가 뭐하고 있지?’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면서 우울증에 시달렸어요.”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한 남편, 공부 잘하는 딸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한 선배가 공부를 권했다. 2002년 당시로선 생소한 실버산업이었다. 30명이 강의를 들었는데 대부분 석·박사들이었다. 그는 바로 자신의 미래인 노인 공부에 푹 빠졌다. 노인심리학을 12번이나 반복해서 듣는 ‘열공’ 끝에 1등으로 졸업했다. 실버산업전문가포럼도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사업도 시작했던 것.

“쉽지 않더군요. 사업은 의상실과는 달랐어요. 더구나 실버사업은 국가 정책과 보조를 맞춰야 하는데, 너무 앞서나갔던 거죠.”

그가 사업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2005년에야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이 제정됐고,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됐다. 그 사이 구 회장은 집까지 팔았다. 유학을 준비하던 딸은 출국을 포기했다. 세 식구가 단돈 3500원으로 끼니를 해결한 날도 있었다. 2007년 사업을 정리하고, 세상과도 작별하기로 결심한 그는 교회를 찾았다.

“목사님을 만나 2시간 동안 속마음을 털어놓았어요. 그러자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힘을 얻은 그는 비영리단체 뉴시니어라이프를 설립한 뒤 시니어모델교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시니어 모델 양성에 나섰다. 2010년 서울형 사회적기업으로, 2011년 고용노동부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았다. “지금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잊었던 꿈을 되찾고 밝게 웃는 회원들을 보고 있으면 힘이 절로 납니다.”

구 회장은 시니어들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다져주는 모델 교실을 통해 건강한 고령화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데,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다보니 선뜻 나서는 기업이나 독지가가 없다고 아쉬워했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