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용신] 달빛처럼 은은한 문탠로드

입력 2013-09-24 17:45 수정 2013-09-24 23:00


추석이라고 달빛이 참 고왔다. 요렇게 쳐다보는데 일 년에 열두 번 떠오르는 보름달 중에서 열 한 개의 보름달은 어디에다 두고 살았나 싶었다. 추석 보름달만 보름달인 것처럼 쳐다봤으니. 아니, 일 년에 딱 한 번만 달이 뜨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적도 많았으니까. 달의 미덕은 은은함에 있다. 눈이 부셔 쳐다보지 못하게 하는 달은 본 적이 없다.

직접 강한 빛을 쏘는 무대 조명이 아니라 전등갓을 쓰거나 벽을 먼저 비추는 간접 조명 같다고 할까. 은은한 조명 속에서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마음을 내려놓는다. 자신을 돌아본다.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가 진실게임을 했던 것도 달빛 아래에서였고 일기와 연애편지를 썼던 것도 밤이 되어서였던 걸 보면.

해운대에 가면 문탠로드(Moontan Road)가 있다. ‘선탠’말고 ‘문탠’이다. 달빛을 받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정서적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달맞이 언덕의 월출을 감상할 수 있는 코스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단다.

문득 온다리쿠가 쓴 소설 ‘밤의 피크닉’ 생각이 났다. 이 책에는 보행제라는 학교 행사에 참여해 24시간 동안 80㎞를 걷는 고교생들이 등장한다. 시간적 배경은 딱 요즘이다. 청명한 하늘과 아직 남아 있는 한낮 더위, 선선한 밤공기, 깊고 은은한 달빛이 있는 가을의 초입. 주인공들은 걷는다.

아침과 낮을 지나 지칠 대로 지친 저녁, 다시 생기가 도는 밤, 평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 놓고 가슴에 맺힌 것들을 풀고 화해하는 시간들을 지나며 ‘그저 걷기만 할 뿐인, 아무것도 아닌 행사가 이렇게 특별한 것인 줄 몰랐어’라고 고백한다.

추분을 지나 밤이 길어지는 절기로 접어들었다. 달빛 아래 걷는 일도 달의 계절인 이 가을에 꼭 해볼 일이다. 찾아보면 경북 영덕의 달맞이 블루로드, 신라 달빛 기행, 창덕궁 달빛 기행 같은 행사도 있다. 하지만 우리 동네 달빛 길을 발굴하는 것만큼 좋은 건 없다. 달빛은 늘 어디나 비추는데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운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 이 일이 아니면 좀처럼 밤에 규칙적으로 달빛을 흡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문에서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까지 길지 않은 거리의 길. 순례자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이 길에 나선 아줌마들을 만나면 대화는 금세 달빛처럼 깊어지기도 한다. 달빛을 닮아 조금 은은해져서 돌아올 수 있는 길. 그 길은 다 문탠로드다.

김용신(CBS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