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가을비
입력 2013-09-24 17:34 수정 2013-09-24 22:22
펄펄 끓던 여름의 태양이 물러나자 촉촉이 가을비가 내렸다. 점심을 먹은 뒤 무더위 탓에 한동안 멀리했던 여의도공원을 모처럼 걸었다. 씩씩하게 여름을 이겨낸 초록 나무들이 가을에 물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국회의사당이 있는 서여의도와 증권사들이 밀집해 있는 동여의도 사이에 위치한 여의도공원은 양쪽의 콘크리트 빌딩 숲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함초롬히 돌아앉은 칸나가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신이 내리는 달콤한 세례수를 온몸으로 음미하고 있다. 갈대는 바람보다 먼저 누웠다.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지천으로 널렸는데 구분을 못하니 안도현 시인한테 ‘무식한 놈’ 소리를 들으며 ‘절교’ 당할지도 모르겠다.
선조들은 ‘가을비는 장인(丈人)의 나룻 밑에서도 긋는다’고 했다. 잠깐 오다 말기 때문에 장인의 턱수염 밑에서도 비를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가을비는 빗자루로도 피한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리 재치 있게 말을 만들었는지 탄성이 절로 나온다. 빗줄기가 가늘기도 하거니와 내리는 양도 많지 않아 들고 가던 우산을 접은 직장인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옛 속담에 ‘여름비는 잠비, 가을비는 떡비’라고 했다. 여름에 비가 오면 일을 쉬게 되고 다른 할 일이 없어 낮잠을 자게 되므로 잠자기 좋고, 가을에 비가 오면 일을 쉬면서 풍성한 수확물로 떡을 해서 먹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궂은비에 가을걷이가 걱정돼도 낙천적 태도를 잃지 않는 선인들의 해학성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는 을씨년스럽다. 시인들도 가을비에 외롭고 쓸쓸한 이미지를 입혔다. 신라시대 고운(孤雲) 최치원은 ‘추야우중(秋夜雨中)’에서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운 마음으로 시를 짓나니/ 이 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없다/ 창밖에는 밤 깊도록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에는 만리고국 향한 마음만 서성인다”고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노래했다.
중국 당나라의 시성 두보는 가을비가 많이 내린 것을 탄식하며 지은 시 ‘추우탄(秋雨歎)’ 1수에서 “가을비에 모든 풀들은 시들어 죽어가는데/ 섬돌 아래 결명초는 빛깔이 새롭네/ …서늘한 바람이 쓸쓸히 네게 세차게 몰아치니/ 뒤늦게 남은 네가 홀로 견디기 어려울까 두렵네/ 당상의 서생인 나는 헛되이 머리만 희었으니/ 바람따라 몇 번이고 네 향기 맡으며 눈물 흘리네”라고 했다. 막바지 늦더위를 물리기 위해 가을비를 내려주고, 새로운 계절로 인도하는 신의 섭리가 놀랍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