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진정한 최고의 고수
입력 2013-09-22 17:06
믿음의 노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적 싸움이다. 왜냐하면 우선 영적 싸움이란 하나님 백성이 피하고 싶어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문제이며, 또 그 싸움에서 지면 ‘이 세상을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도 지치고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영적 싸움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이기는 싸움을 위해 대가(大家)를 한번 쳐다보자. 최고가 되려면 최고를 만나야 한다고 했던가! 갈멜산의 무지막지한 영적 싸움을 승리한 엘리야를 보라.
우리가 최고수 엘리야의 모습에서 흥미롭게 발견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여유와 자신감이다. 그 여유와 자신감은 적들을 향해 조롱을 퍼붓는 모습 속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적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엘리야의 모습, 이것이 너무도 인상적이다. 이것이 최고수의 특징이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보았던 중국 영화가 생각난다. 무림을 평정하는 무술의 고수가 등장하면 그 앞에서 모든 무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그런데 이 무서운 무림의 고수를 제압하는 또 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는 겉모습이 허술하기 그지없는 아주 못생긴 영감이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지도 않고, 상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상대를 슬슬 비웃으며 조롱하다 결국은 상대를 제압한다.
무섭고 비장한 자세로 싸움을 이기는 사람을 우리가 고수라고 한다면 상대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이기는 사람은 고수 위에 있는 최고수(最高手)다. 갈멜산에서 보여준 엘리야의 모습은 고수가 아니라 최고수의 모습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굳은 표정과 비장한 각오로 마귀를 상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비웃으시며 간단히 쫓아내셨다. 주님은 고수가 아니라 최고수였다. 드릴라의 품에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고민하며 갈등하다 결국 넘어지는 삼손을 생각하면 역시 삼손은 최고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최고수였다면 드릴라를 비웃으며 그냥 한대 쥐어박으면 그만이다. 삼손이 정말로 성령에 충만했다면 그저 조롱하고 비웃어버렸을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를 조롱하는 하나님이시다. 태양을 신이라고 경배하는 사람들을 향해 창세기 1장은 태양을 가리켜 빛을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태양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요 그야말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해학이요 조롱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재물과 쾌락의 유혹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그 앞에서 이를 악물고 넘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모습, 그것이 여태껏 내가 하나님께 보여드린 모습의 전부였다. 오늘따라 하나님께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나는 왜 조롱하고 비웃어 버리지 못할까? 영적 고수가 아닌 최고수의 모습을 왜 보여드리지 못할까? 죄의 도전과 유혹 앞에서 비웃고 조롱함으로써 마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 왜 이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원수를 조롱하는 엘리야의 모습 속에서 나는 잠시 이 시대와 나의 영적 빈곤함을 보게 되었다.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