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정기] 가장 길고도 짧은 여행
입력 2013-09-22 19:04
우리 가족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명실상부한 핵가족이 되었다. 추석 차례를 마치고 사회인이 된 딸, 아들과 음복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추석이 예전 같지 않으며, 또래들도 명절을 이제는 여느 휴일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많은 가족들과 원근의 친지들이 모여 떠들썩하던 때와는 다르게 덩그러니 맞는 탓이리라. 2012년 통계청 조사도 국민의 49%가 명절을 연휴 개념으로 여긴다고 밝혔다. 명절에 가족과 친지가 꼭 만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매우 높아졌다고 한다. ‘명절쇠퇴론’의 증상이 완연한 것이다.
핵가족화로 ‘명절쇠퇴’ 증상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우리나라 1733만9000가구 가운데 1인 가구가 414만2000가구(23.9%), 2인 가구가 420만5000가구(24.3%)로 1∼2인 가구를 합하면 48.2%에 이른다. 1인 가구 비율이 처음으로 4인 가구 비율(22.5%)을 뛰어넘었고, 이러한 추세는 가속화하여 2025년에는 31.3%, 2035년에는 34.3%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산업화, 서구화가 가져온 핵가족화, 탈가족화와 함께 개인주의와 남녀평등의식의 확산으로 인한 가족공동체의 약화가 명절에 대한 평가절하를 지나 ‘명절사망론’을 넘볼지도 모르겠다.
명절은 ‘전통적으로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함께 어울려 즐기는 날’이다. 추석 명절은 부모님에게 인사드리고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성묘하는 마땅한 도리를 행하는 명분(名分)과 절의(節義)의 날이다. 추석에는 이웃과도 반갑게 어울려 안부를 묻고 음식을 나누고 함께 왁자지껄 어울렸다. ‘명절공동체‘였던 셈이다. 개인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관계를 중시하는 협력공동체감을 느끼는 기회였다.
매년 추석이면 매스컴은 귀성과 귀경 보도로 뜨거웠다. 올해도 예외 없이 이동인구와 차량 대수에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도로 곳곳이 거대한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극심한 교통 정체. 피곤을 나누려고 아빠, 엄마, 아들이 교대하며 운전대를 잡는다. 마침내 고향에 도착하면 어른들은 뛰쳐나와 손자 손녀를 부둥켜안으며 웃고 귀향길 피로는 싹 날아간다. 조상의 묘를 찾아 보살피는 모습엔 정성이 가득하다.” 뉴스가 전하는 이런 추석 풍경엔 부부사랑, 가족사랑, 조상사랑, 고향사랑이 있다. 옅어져 가던 사람과 자연에 대한 한국적 사랑이 복원되고 고인이 된 선대를 대하며 당대와 후대를 헤아리게 된다.
명절 공동체는 관계의 지혜 줘
명절피로감, 명절증후군, 명절이혼 등의 문제는 대처하고 고치면서, 명절에서 얻어 온 긍정적인 가치는 발전시켜가야 한다. 서구식 가치에 압도되어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 가치를 체득하는 소중한 기회로 맞아야 한다.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 무분별한 개인주의와 경쟁 일변도의 서구식 교육틀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 아이들의 기를 살리는 데 활용해야 한다. 대한민국을 점령한 물질만능과 이기주의로 왜소해진 한국인의 도덕성과 정체성의 뿌리를 인식하고 실행하는 소중한 문화가 되어야 한다. 이제 시대는 행복하려면 돈, 권력, 지위보다 자기 정체성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라고 충고한다. 명절공동체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고 타인에게 무례하지 말고 배려하라는 관계에 대한 지혜를 준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스스로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에 가려고 평상시보다 몇 배 더 걸리는 고난의 시간을 도로 위에서 보냈던 추석의 기억을 한국인은 공유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세계일주보다 더 먼 여행,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여행”이라고 했다. 머리에서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닿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네 인생에서 부모님을 향한 명절 여행. 그건 주차장으로 변한 도로를 헤매야 하는 가장 긴 여행이고, 머리와 마음의 일치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여행이다.
김정기 (한양대 교수·언론정보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