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손병호] 21시간 노동과 공존의 지혜
입력 2013-09-22 18:23
‘21 hours’. 영국의 비영리재단 ‘뉴이코노믹스 재단(NEF)’이 3년 전 내놓아 유럽의 대안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보고서 제목이다. 지속가능한 사회·경제 체제를 만들기 위해선 1주일에 21시간만 노동을 해야 한다는 파격적 제안을 담고 있다. 그래야 40시간 이상 노동할 때의 각종 사회적 병폐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21시간을 일할 경우 1주일에 4일 정도 근무하고 나머지 3일은 쉬어야 한다. 하루 노동시간도 5시간 정도다. 그렇게 되면 근로자들의 수입이 줄게 돼 기존의 흥청망청한 소비를 줄이고 꼭 필요한 물건만 사고 쓴다. 불필요하게 먹고 마시는 일도 줄어든다. 일찍 귀가함으로써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부부 모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 자연스레 가사 노동의 불평등이 해소되고 셀프 육아와 보육도 확대된다. 레저나 자기개발, 취미, 운동 등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할 수 있게 된다. 물건이나 음식, 채소를 꼭 사지 않고도 스스로 만들거나 재배해 충당하게 된다. 무엇보다 과로에 따른 스트레스가 줄어 건강이 더 증진된다.
사회적으로는 취업자 수가 늘게 된다. 각자는 덜 벌지만 더 많은 사람이 돈을 벌게 돼 이전보다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가난과 불평등이 줄면서 범죄가 감소하게 되고, 각종 복지비용도 덜 들게 된다. 혼잡비용이나 탄소배출 등도 줄게 돼 전반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로 탈바꿈하게 된다는 게 보고서의 요지다.
이런 주장에 반론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병폐를 줄이기 위해 구성원들이 양보와 희생을 통해 기존 삶의 방식을 바꿔가고, 과실을 최대한 균등하게 나눠 불평등과 불만을 해소해나가는 메커니즘은 눈여겨볼만하다.
추석 연휴에 보고서를 다시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최근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황우여, 민주당 김한길 대표 간의 3자 회담이다. 사회적 비용을 줄여나가는 회담, 과실을 나누는 회담이 됐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이다. 회담이 빚어낸 막대한 사회적 ‘불화(不和) 비용’을 당사자들이 한번이라도 심각하게 고민해봤다면 도저히 그런 결론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회담 결과가 초래한 불화의 비용은 끔찍할 정도다. 당장 수천만명 국민들이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인터넷 포털과 신문, 방송의 메인 뉴스 자리를 며칠 째 ‘싸움의 정치’가 독차지하고 있다. 전국의 추석상은 ‘박근혜가 나쁘네’, ‘김한길이 나쁘네’ 하는 정치적 언쟁으로 채워졌다. 정치권의 싸움과 갈등이 한 국가의 주된 담론이 되다보니 다른 중요한 담론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지고 그만큼 그 사회가 성장할 기회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여야와 일부 언론이 추석 이후까지도 ‘추석 여론전에서 누가 이겼는지’를 놓고 재차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가 승자와 패자를 구분짓는 것에만 함몰되다 보면 일찍이 검투사들의 싸움을 즐기던 로마인들처럼 어느 한쪽의 무자비한 승리와 다른 쪽의 비참한 최후에도 박수를 치는 냉혈한의 사회가 될 수도 있다. 당장에는 승패가 흥미진진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사회는 피의 악순환만 남을지 모른다.
때문에 싸우기 전에 대결과 불화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먼저 생각해보고, 누군가를 이겨서 얻는 전리품보다 공존에서 평화의 가치를 찾아내는 지속가능한 정치를 고민해봐야 할 때다. 박 대통령과 민주당부터 그래야 한다. 들녘에 아직 추수할 게 많이 남아 있다.
손병호 정치부 차장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