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준섭] ‘일본형 상대적 정의감’

입력 2013-09-22 17:31


일본의 기독교신자 수는 전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이다. 실은 진짜 교회가 아니라 결혼식장의 부속 교회라고 해서 교회의 모양을 한 건물에서 식이 거행되는 것이다. 다만 건물만 교회 모양이 아니라 하는 방식도 서양의 결혼식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목사가 진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목사도 진짜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일본인 커플이 평범한 일본인 목사보다도 영화에 등장하는 성직자 풍모의 외국인 목사를 선호하기 때문에 수일간의 ‘목사양성강좌’를 들은 외국인, 심지어는 영어학원 강사가 아르바이트로 이와 같은 결혼식을 주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종교의식의 겉모습만 편리하게 받아들여서 이용하는 이와 같은 감각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인 사카이야 다이치는 ‘일본이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저서에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본디 ‘신의 가르침’, 그리고 그것이 기록된 경전과 계율이라고 하는 ‘절대적 정의’를 믿고 따르는 것에 의해 성립된다고 하면서, 일본인에게는 그와 같은 형태의 종교심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결과 ‘신의 가르침’과 같은 절대적 정의가 없는 일본에서는 ‘그때’ ‘그 장소’의 지배적인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정의’가 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 ‘정의’는 구성원들의 이익에 합치하는 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일본인의 정의감을 ‘일본형 상대적 정의감’이라고 부르면서, 일본은 이익에 맞추어서 정의를 조절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한 나라라고 시니컬하게 말한다.

사카이야는 이 ‘일본형 상대적 정의감’에 의해 일본인들이 새로운 상황에 재빠르게 대처하여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미국에 결사적으로 항전하던 일본은, 전후 마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미국 스타일의 생활양식을 동경하며 경제발전을 이루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형 상대적 정의감’의 문제점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 ‘그때’ ‘그 장소’의 지배적인 사람들의 이익에 합치한다는 이유로 ‘정의’가 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한때 일본의 신문 지면을 크게 장식했던 증권회사들의 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손실보전 문제를 생각해 보자. 분명히 정의롭지 못한 이 행위가 증권회사에 있어서는 ‘정의’였던 것이다.

현재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문제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일본형 상대적 정의감’이 등장한다. 올림픽 유치를 위해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날아간 아베 신조 총리는 9월 7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오염수’는 완전히 통제되고 있다고 발언했다. ‘올림픽 유치’라고 하는 ‘정의’ 앞에서, ‘오염수’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대처라고 하는 ‘보편적 정의’는 도외시된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도쿄전력의 간부가 이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야당이 이를 문제삼음으로써 이 발언은 현재 정치문제가 되어 있다. 14, 15일 실시된 마이니치신문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6%가 총리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변했으며, 20일 전 지역이 피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후쿠시마현의 나미에마치가 항의서를 가결하는 등 파문은 확산되고 있다.

일본인들이 이와 같은 ‘일본형 상대적 정의감’에서 벗어나 ‘보편적 정의감’에 기초한 행동들을 취할 때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더욱 신뢰를 받게 될 것이다. 또한 한일 간의 역사인식 문제 역시 일본이 ‘일본형 상대적 정의감’에 사로잡혀 있는 이상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오염수’ 문제를 둘러싼 일본 내의 논란이 ‘일본형 상대적 정의감’이 붕괴되는 작은 단초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준섭 국방대 안보정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