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남혁상] 유엔총회 기조연설

입력 2013-09-22 17:30

매년 가을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UNGA)는 유엔 전체 회원국이 모여 여러 국제이슈를 논의하고 의견을 모으는 자리다. 이 자리에선 또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회원국 대표의 기조연설도 이뤄진다. 각국 대표들은 특히 기조연설 준비에 심혈을 기울인다. 자국 정책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2004년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이라크전쟁이 독재자로부터 국민을 구해낸 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에 국제사회가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해 연설에서 이란 핵 개발의 위험성을 각국에 설파했다. 본인이 직접 폭탄 모양의 도표까지 들고 등장한 것은 덤으로 눈길을 끌었다.

기조연설 제한시간은 15분이다. 100여개 회원국 대표가 총회 기간 돌아가면서 연설하려면 그 정도만 해도 빠듯하다. 그러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는 생전인 2009년 총회에서 1시간36분 동안 연설을 했다. 대부분 자신의 치적 홍보였고, 유엔본부를 리비아로 옮기자는 황당한 제안도 했다. 최장시간 연설 기록은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갖고 있다. 그는 1960년 무려 4시간30분간 미국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이렇게 보면 기조연설은 좋은 쪽이든, 황당한 쪽이든 자국 입장을 외부에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만큼은 분명히 있는 듯하다.

제68차 유엔총회가 17일(현지시간) 개막했다. 기조연설은 24일부터 시작된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기조연설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공교롭게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역시 기조연설에서 여성 인권을 중시한다는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고 한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에는 무책임한 자세로 일관하면서 세계 여성 인권을 존중한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모순된 일이 또 있을까.

윤 장관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확실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난해 총회 연설처럼 ‘무력분쟁 하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 식으로 미지근하게 돌려 말해선 일본 정치인들의 비뚤어진 역사관을 바로잡기 어렵다. 이미 제3자인 세계 각국 의회들도 위안부 관련 결의를 채택한 상황 아닌가. 하물며 직접 피해 당사국이 일본 입장을 고려해 외교적 수사로만 압박한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번만큼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에 경각심을 일깨워 줄 촌철살인의 연설을 기대해 본다.

남혁상 차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