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혜훈 (14) 4選 의원 시아버지 갑작스런 별세로 정치 첫발

입력 2013-09-22 17:06 수정 2013-09-22 19:35


50년 가까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정치를 시작한 것이었다. 계획한 적도, 생각해 본적도 없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전혀 다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역 4선 국회의원이시던 시아버님(김태호 전 내무부장관)께서 갑자기 혈액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시다 10개월을 채 못 넘기고 2002년 7월 돌아가셨다. 시아버님을 따르던 분들 중에는 유족 중에서 잔여임기 1년 반을 맡아 고인의 정치인생 20년을 마무리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분들이 많았다. 시아버님은 19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 및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하셨는데 이 때문에 대선과 관련된 몇 개의 재판을 받다 별세하셨다. 유족 중에 누군가가 고인의 잔여 임기를 맡아 오명을 벗겨드려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고인이 생전에 가장 아끼고 사랑했으며, 정치를 가장 잘 할 것이라고 자랑했던 큰 며느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고 강권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시아버님 선거 때가 되면 열과 성을 다해 현장 잡일부터 선거 전략까지 온갖 일을 다하며 선거를 도와드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하는 일이 정책자문이다 보니 국정감사나 대정부질의 때가 되면 자연스레 정책질의서를 써드리고 정부정책의 문제점을 짚어 드렸다.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며느리로서 시아버님을 도와드린 것일 뿐이었다.

시아버님은 독서량이 많은 분이셨는데, 내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관련된 대목이나 아이디어가 될 수 있는 부분은 꼭 밑줄을 쳐서 참고하라고 갖다 주셨다. 그러면서 정치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도 많이 들려 주셨다. 시아버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KDI에서 정책 자문을 오래하며 느낀 답답함을 생각하면 자문보다는 직접 뛰어드는 것도 방법이었다.

일단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문제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음을 중립기어에 놓고 새벽기도, 철야기도에 돌입했다. 정치에 뛰어 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울산 중구 보궐선거에 공천신청을 했다.

그런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최종단계까지 가지도 못하고 서류심사에서 낙방했다. 더 기 막힌 일은 실업자가 됐다는 사실이었다. 한나라당에서는 당원만 공천을 받을 수 있다며 입당 먼저 하라고 했다. 당시 근무하던 KDI는 국책연구소여서 정당활동이 금지돼 있었다. 주변에서는 일단 공천 받으면 그때 사직서를 내도 되는데 왜 미리 내느냐고 말렸지만 ‘원칙은 원칙’이라는 고집에 사직서를 내고 입당 절차를 밟았는데 공천에서 떨어진 것이다.

실업자가 된 충격은 하루하루 갈수록 점점 커졌다. 아침에 일어나도 출근할 곳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학회나 세미나도 갈 수 없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그렇게 정치적이야’ ‘여태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던 거야’ 등 정치적 야욕덩어리에 내숭지존이란 식의 눈초리로 보는 것만 같았다.

변호사나 의사들과 달리 우리처럼 갑근세 내는 월급생활자들은 일단 직장을 이탈하면 재진입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정치인을 한 공간 내에서 같이 호흡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학계의 경우 정치권 진입에 실패한 사람이 다시 돌아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 영원한 실업자로서 경력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매일 QT하는 구절은 달라도 하루 종일 머리 속을 맴도는 구절은 시편 42편3절뿐이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