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추석예찬
입력 2013-09-17 16:03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소설가 박경리는 ‘토지’에서 추석을 그렇게 묘사했다. 소설은 1897년 한가위 때로부터 시작된다. 송편을 입에 물고 기뻐 내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첫 문장에 담아내는 등 민족 대명절의 들뜬 향연을 노래하는 듯하더니 이내 추석의 속내를 아프게 지적한다.
몰락해가는 민초들의 실상을 소설 첫 자락부터 일찌감치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당시 동학농민전쟁에 휘둘리고 갑오개혁의 변화에 혼란스러워하면서 국모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의 통한을 짊어진 백성들에게 한가위는 이미 단순한 축제일 수 없고 마치 소복단장한 청상과부의 비애처럼 온기 잃은 달빛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배곯고 억눌리던 시절의 추석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해방이 됐지만 남북이 갈리고 총부리를 겨눴기에 그리고 그 처절한 전쟁의 폐허 위에서 한동안 아픈 추석은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 남한에서 보릿고개란 말이 없어진 것도 겨우 1970년대 들어와서다.
지도자 잘못 만난 북한은 보릿고개만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식량난에 허덕인다니 북한의 추석은 박경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거창하게 트레이드오프(trade off) 관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쌀 사먹을 돈으로 미사일 들여놓는 데 열을 올리니 백성들 배곯는 것이야 당연지사다. 그곳에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하는 축제’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게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다.
상대적 빈곤을 따진다면 남한의 추석도 행복한 축제로 자리잡았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명절이면 더욱 서러운 이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라는 이유로 그나마 명절 때만이라도 보내졌던 지원이 끊겨 어려움을 겪는 이들, 고향생각에 젖어 있을 이주노동자들, 기다림에 지쳐가는 이산가족들….
여기에 격심해진 양극화 탓에 ‘그들만의 풍요’와 ‘비루한 내 자신’으로 대비되는 현실에서 확산되는 심리적 불안감도 무시하기 어렵다. 이 한반도에서 추석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의 축제’로 뿌리내릴 때, 과연 그때가 오는 것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추석을 기다린다. 희망은 역사를 바꾸는 힘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추석예찬을 말하는 이유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