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혜훈 (13) 시부모는 염불, 며느리는 찬송… 한지붕 두 믿음

입력 2013-09-17 15:43


지구 한 바퀴를 돌아 8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과 영국생활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으되 오히려 심령은 가난했고 영적으로는 깨어있었던 시기’라면 귀국 직후의 생활은 ‘오랫동안 고대하던 본향으로 돌아왔는데 몸도 마음도 영혼도 힘들고 지친 나날의 연속’이었다.

섬기는 교회를 정하는 일부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해외에 있을 때는 목사님들 설교 테이프, 찬양집회 테이프 등을 들으며 서울에 가서 섬길 교회 리스트를 남편과 둘이서 상의하는 것이 낙이었다. 찬양을 좋아하는 나는 1순위가 O교회, 말씀에서 헌신과 구제를 우선시하는 남편은 1순위가 S교회,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맏며느리로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다보니 주일에도 시아버님 점심상 차리는 데 지장 없도록 12시 이전에 돌아와야 했다. 교회 선택의 기준은 무조건 집에서 반경 1㎞ 이내인 곳으로 좁혀졌다. 교회에서 점심, 주방봉사, 친교 등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시어머님은 집안 전체에 울려 퍼지도록 염불 테이프를 틀곤 하셨고, 시외할머님은 새벽에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시기도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CCM을 크게 틀어두는 버릇이 있는데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경상도식인지 몰라도 남편은 무슨 일을 하든 용인되고 환영받았다. 세 손주도 남자였기 때문에 비교적 관대하셨다. 아이들이 즐겨 듣는 테이프들은 주로 성가였지만 날마다 틀었다. 남편이 지도하는 대학 성경공부모임의 제자들을 집으로 불러 예배도 드렸다.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친구 분과 통화하시면서 “시어머니는 염불, 맏며느리는 찬송가 부르면서 잘 산다”고 하시길래 종교가 극단적으로 다른 두 세대가 이렇게 차츰 어우러져 가는구나 생각했다.

직장생활도 꿈꾸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막연하게 머릿속에 그렸던 것과 현실은 사뭇 달랐다. 경제학을 전공한 내게 주어진 일들은 사회복지제도나 지방정부 개혁안, 호남고속철도 타당성조사, 의약분업 등 이름부터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다. 사회복지학, 행정학, 토목학, 예방의학 등의 개론서부터 사서 날밤을 샜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심했다. 기관장이 다짜고짜 “여자가 무슨 리서치는 한다고 그래”라고 핀잔 줄 때부터 예감은 했다. 회의 때 공식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갑자기 나를 지목해 “이 박사는 애 보러 가야 하지 않아? 애는 역시 엄마가 키워야 해, 그래야 애들이 제대로 자라” 하면서 뜬금없는 얘기를 하곤 했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마치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여자’라는 식의 낙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직장에서 여성이 임신하면 다른 남성 직원들에게 업무가 떠넘겨진다는 식의 인식이 있어서 여성들은 임신사실을 공개하기 어려웠다. 셋째를 가졌을 때는 출산 직전까지 직장에 얘기하지 않고 묘한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눈치 빠른 몇 사람을 제외하곤 몰랐다. 매달 가는 산행 날, 등산복을 입고 나서는데 산통이 와서 응급실에 갔다. 직장에 출산으로 결근한다고 통보했는데 다들 놀라 기겁을 했다.

그때는 끝이 보이지 않는 연단의 시기로만 여겼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정치는 국민의 생활 구석구석을 살펴야 한다. 복지제도의 세세한 부분들, 지방정부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전철 사업은 타당성이 있는지, 건강보험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등 경제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그때 날밤을 샜던 문제들이 지금 피가 되고 살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한국 땅에서 여성들이 집과 직장에서 날마다 겪는 편견과 차별의 문제, 출산과 육아의 문제를 ‘등산복 출산’을 겪으며 누구보다 절절히 체감하고 대책에 골몰하도록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