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형 칼럼] 하나님의 꿰뚫어 보는 눈
입력 2013-09-16 17:20
목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님처럼(Just like Jesus)’에서 이런 제안을 한다.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의 마음을 충분히 들여다보자.” 탁월한 기독교 교육학자인 파커 파머는 성경 속 요나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그 내용을 묘사한 프리츠 이첸베르그의 목판화 원본에 대해서 말한다. “목판화의 중간쯤 중앙에서 왼쪽 부분에는 어둠을 꿰뚫는 빛으로 가득한, 모든 것을 보는 눈이 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눈이다. 항상 요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눈, 소위 ‘그를 꿰뚫어 보는’ 눈이다. 이 어구에는 아주 멋진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은 요나와 요나의 오해와 망상을 꿰뚫어 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끝까지 요나와 함께 거하실 것이다.”
요즘 우리 주위의 돌아가는 사태를 보면서 ‘하나님의 꿰뚫어 보는 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러 사안에 대해서 이해당사자들의 견해는 너무나 다르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해석하는 세상이다. 특히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의 견해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다름은 틀림이 되어서 서로를 찌르고 있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견해의 차이는 극명하다. ‘혼외 아들’의 실재에 대해 어느 한쪽은 분명 틀렸을 텐데 서로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그 문제의 본질에 대한 입장 차이도 너무나 크다. 청와대와 여당과 야당, 검찰, 소위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간의 주장에 국민들은 헷갈려 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진실일까? 크리스천들은 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루케이도의 제안을 한국의 현실에 대입시켜 본다. “음모와 공작이 난무하는 정치의 영역 속에서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 거기에 깃든 그리스도의 마음을 충분히 들여다보자.”
‘예수님처럼’ 사안을 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안을 본다고 해도 거기에는 편견이 개입될 수 있다. 각자의 환경과 신앙 배경, 소속 교단과 교회, 혹은 신학적 견해 등에 의해 ‘예수님처럼’ 된다는 뜻은 정반대의 모순된 길로 가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성경대로’란 원칙도 얼마든지 자기 진영의 논리를 강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명박 정권 당시 광우병 파동에서 어떤 사람은 ‘성경대로’ 시위 현장에서 촛불을 들었지만, 또 다른 사람은 ‘성경대로’ 촛불시위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하나님의 마음, 그분의 본심은 어디에 있는가. 이같이 엉망진창인 현실 세계에서 소위 ‘영적인 삶’을 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여러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독교 공동체의 능력이 있기나 하는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눈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눈이 2013년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그 눈은 인간의 음모와 밀실의 계책, 거짓으로 포장된 선함, 오만한 권력과 언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자신의 뺨을 때리는 거짓 종교인들의 숨은 동기들을 낱낱이 보고 계신다. 요나의 오해와 망상을 꿰뚫어 보신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를 역시 꿰뚫어 보신다.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이겠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희망이다. 지금, 하나님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