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가을이 쓸쓸한 이유
입력 2013-09-15 17:34 수정 2013-09-15 19:17
몇 해 전 한 중학교 여교사의 체험 수기를 담은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하루는 2학년 학생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시(詩)를 쓰게 했는데, 학생들이 제출한 시 가운데 이 선생님의 눈에 띄는 시가 한편 있었다. 승렬이라는 학생의 시였는데, 제목은 ‘잘한다는 것’ “애들은 공부를 잘한다고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본다 / 내가 조금만 실수를 하면 / 네가 그러고도 전교 3등이냐? / 이렇게 야유를 보낸다 / 시험 때마다 어머니는 내 어깨에 짐을 얹으신다 / 이렇게 살기 싫다 / 그러나 도피하기는 늦었다 / 나는 어려움을 버텨야만 한다 / 이 다음에 태어나면 좀 더 편하게 살리라” 선생님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던 대목은 마지막 구절이었다.
“이 다음에 태어나면 좀 더 편하게 살리라” 스트레스 받은 한 철부지 학생의 하소연일까? 아니다. 나에게는 참된 안식을 잃어버린 인류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들린다. 그렇다. 진정한 안식을 찾으려는 인류의 꿈은 중단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인기 가수가 자신의 최근 심경 변화를 솔직하게 고백하여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과연 인생이 이것이 전부인가?’ ‘정말 죽음으로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인가?’ 이런 질문과 함께, 그는 자신의 노래가사 속에 이렇게 표현했다. ‘놀만큼 놀아봤어. 또 벌 만큼 벌어봤어. 예쁜 여자, 섹시한 여자와 함께 즐길 만큼 즐겨봤어. 결국엔 또 허전했어. 언제나 그때뿐이었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들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영혼의 갈증’이다. 공허함을 감지하는 영적 더듬이! 그것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던 것이 이것이 아닌가? 우주 속에서 물방울처럼 연약하고 비참한 인간! 그러나 바로 그 갈대처럼 연약한 인간이 여전히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비참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간을 일명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갈증을 거두어 가지 않으셨기에 사람은 감당 못할 공허함 속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삭개오를 보라. 돈을 위해 신앙도 민족도 팔아먹은 그가 어느 날 왜 예수가 보고 싶어졌을까? 도둑놈은 죽어도 경찰을 만나기 싫은 법인데, 도둑놈 같은 인생을 살았던 그가, 하필 돈을 사랑치 말라고 그렇게 무섭게 강조하신 예수를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했을까? 보고 싶은 마음에 발길이 이끌렸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미친 듯이 달렸고, 급기야 나무 위에 기어 올라가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눈물나게 처절한 한 영혼의 몸부림이다. 인생의 공허함을 감지해 내는 영혼의 더듬이, 바로 그것을 통해 영혼의 주인에게로 달려가려는 거룩한 투쟁이다. 가을을 타는 남자들에게 쓸쓸한 바람이 부는 이 계절은 괴롭기만 하다. 그러나 가을이 쓸쓸한 이유는 안식의 품으로 영혼을 부르시는 창조주의 초청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승렬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 다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편하게 사는 길이 있다고!’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