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조성수 남아共 선교사] “선교는 결코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입력 2013-09-15 17:26
병들어 고국에 돌아왔을때 실패·허망감에 고통… 그 땅에 다시 세워주셔서 감사
1987년,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보츠와나에 한국인 선교사로 처음 발을 디딘 뒤 팀 사역을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짧은 몇 해를 보냈습니다. 목공, 편물, 양재 등 여러 기술을 가진 한국인 선교사들이 기술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한국인 선교팀은 자녀들까지 합해 30명이 넘었습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다 실습을 위한 교실, 기숙사와 식당 등을 건축하느라 늘 벼랑 끝에 서 있는 위기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얼마든지 불만이 있었겠지만 모두들 ‘삶이 그러려니’ 하면서 잘 이해하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병들고 실패감에 젖어
시간이 지나면서 몸들도 부실해졌습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몸에 힘이 없었습니다. 주먹을 쥔다고 쥐어도 모양만 주먹일 뿐 힘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B형 간염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약을 거의 1년간 복용했습니다. 검사를 받는 횟수가 잦아들 무렵 병원 가는 것을 스스로 중단했습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표현할 수 없는 매우 높은 소리가 윙윙거리며 들렸습니다. 그 소리 때문에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턱뼈 이상인 것을 확인한 뒤 아래의 어금니 8개를 삼각형으로 갈아낸 자리에 금을 씌워 전체적으로 치아의 높이를 약간 높였습니다. 그랬더니 머릿속의 고음은 사라졌지만 오늘까지 음식을 씹는 것이 불편합니다.
1992년, 보츠와나에 간 지 5년이 지나자 몸도 마음도 심히 아파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과 친구들이 있고 늘 기도하며 염려해주던 성도님들 곁으로…. 돌아오는 날 공항에선 작은 누님만이 저희 네 식구를 반겨줬습니다. 저와 아내,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2학년 딸의 비행기 티켓을 사는 데 든 400여만원은 변함없는 우정을 보여준 친구 목사가 주선해 빌렸습니다.
식구가 많은 작은 누님 집에 머무르다 누님이 마련해 준 보증금 200만원으로 서울 갈현동의 허름한 집을 얻어 살았습니다. 연탄을 때던 46만원짜리 월세방입니다. 책장 가재도구 등은 길에서 주워온 것들을 썼고 막노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몇몇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으나 모두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보츠와나에 뼈를 묻을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한국에 돌아와 살아갈 것 같으니 실망스러워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상황을 이해할 것이라 기대하며 찾아갔던 교회에선 “선교지에서 나왔으니 선교비를 이젠 보내지 않아도 되겠느냐”고 오히려 되물었습니다. 깨진 인간관계에서 오는 절망감, 당장 가족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감과 암담함 등이 착잡함을 넘어 허망함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선교사, 아픈 선교사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활자로 박힌 뚜렷한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비록 무엇 하나 제자리에 있는 게 없었지만 꼭 다시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섬기는 교회를 통해 새로 만나게 된 형제자매들 덕분에 조금씩 정신을 차리게 됐고 꾸준히 병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기도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영적인 회복도 돼 갔습니다.
그러면서 아프리카 땅에 한번 부름을 받은 사람은 다시 또 그 땅에 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다시 갈 형편은 아니었지만 저와 비슷한 처지의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주실 줄로 믿고 무명 선교사의 얘기를 싣는 월간 ‘한국인 선교사’를 창간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됐습니다.
한국을 떠나 선교지로 향할 때 주변을 모두 정리하게 될 텐데 행여 저처럼 지쳐 돌아오는 선교사들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간 선교사 중 절반 이상은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올 텐데 그들이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지도 걱정됐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오는 몇 명의 선교사라도 편안하게 며칠 밤이라도 머물 수 있도록 인천 구월동에 작은 선교사 쉼터를 마련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이런 일을 하다보니 저 같은 어려움을 느끼며 한국에 돌아온 선교사들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황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누구보다 화려하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역을 하던 선교사들. 그 사역의 소리가 끊겼다 싶으면 그들은 어디엔가 꼭 숨어 지내는 것입니다. 병원 한 구석에서 머리카락 하나 없이 암으로 투병하던 싱글 여자 선교사는 월간지에 실리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는 마음의 상처를 가진 선교사 역시 자신의 얘기를 알리는 데 대해 손사래를 쳤습니다.
바울 선교사님의 선교 보고는 어찌 보면 파송하고 후원하는 성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근심과 염려를 끼쳤을지도 모릅니다. 데살로니가서에 기록된 그의 선교 보고서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과 능욕을 당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간사하고 부정하며 속임수였고 아첨이나 탐심을 가졌었던 것’이라고 그를 반대했던 몹쓸 사람들의 얘기도 가슴 아프게 전해집니다. 또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기도 했고 파선을 당하기도 했고 여러 환경에서 오는 위협과 먹지 못하고 춥고 헐벗었던 것 등이 파송하고 후원하는 교회들에 보고됐습니다.
선교사로 사역하다 감옥에 갇히시더니 바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을 놓고 파송 및 후원교회는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물론 그 교회들은 잠깐의 슬픔과 혼란을 뒤로하고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소리 없이 힘차고 우렁찬 박수를 하나님께 올리며 그의 뒤를 이어 선교에 더 한층 힘을 쏟았겠다 싶습니다만…. 병들고 실패감에 젖은 선교사들을 따뜻하고 넓은 가슴으로 맞아주고 결코 실패가 아니지만 실패처럼 보고 되는 그 소리에 귀를 크게 기울이고 그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려는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날 이유가 여기에 있을 듯합니다.
주님 안에서의 행운아
저는 행운아입니다. 아프리카 땅의 한 구석에 다시 있도록 해 주셔서 고향에 사는 것 같은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비록 아직 실수가 많지만 주님께 작게라도 쓰임 받는 것에 감사함이 넘치고도 큽니다. 물론 예전의 상처는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나름 아물어졌더라도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게으르고 절제하지 못해 건강을 잘 유지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해가 거듭되면서 한 번씩 아프면 전보다 더 오랜 시간 누워 있어야 하는 것도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 땅에서 이처럼 하루를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역을 열심히 하다 힘든 과정을 겪게 된 동료 선교사들의 소식을 들을라치면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 그 동료들에게 마음이 쓰입니다. 이분들도 주님 안에서 저처럼 행운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선교는 결코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교통사고로 선교사 남편과 아들을 선교지에서 하나님께 보내드리고 그 사고의 후유증에 시달려 그 예쁜 모습을 가꿀 여력도 없던 이영미 선교사님께서 보내주신 말씀 한 구절을 떠 올리며 이 편지를 닫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2)
● 조성수 선교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소속 선교사, GP선교회 협력선교사
△1956년생. 84년 성결대 신학과 졸업
△87년부터 5년간 보츠와나에서 사역
△95년부터 ‘월간 한국인 선교사’ 편집인
△99년부터 남아공 루스텐버그에서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