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웃의 추석] 이란 출신 공장근로자 메흐르덧

입력 2013-09-13 19:02 수정 2013-09-13 19:15


팔에 문신을 새겼다… ‘엄마 보고 싶어요’

13일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 7월 말까지 국내 거주 외국인은 총 154만2211명에 달한다. 이들 가운데 맞벌이 가정에 상주하는 중국동포 도우미, 회사 식당에서 서빙하는 아줌마, 건설현장 인부 등 주로 3D 업종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52만여명(2013 안전행정통계연보). 대한민국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잘 보이지 않는 그들이다. 추석 명절을 앞둔 지금 주변의 그들에게 한번쯤 시선을 옮겨보는 건 어떨까.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아들과 딸의 만남을 간절히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을…. 추석의 설렘 대신 외로움을 안고 있는 ‘조금 특별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9일 경기도의 한 유리공장. 회색 모자를 깊게 눌러쓴 메흐르덧(45)씨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손에 낀 목장갑의 시커먼 먼지가 그대로 얼굴에 묻었다. 그는 이곳에서 길이 2m가 넘는 유리판을 나른다. ‘힘이 세다’는 이유로 30∼40㎏에 달하는 대형 유리 운반을 도맡는다. 몇 차례 유리를 옮긴 후 잠깐의 휴식시간, 그는 하늘을 쳐다봤다.

“딸을 생각해요. 못 본 지 11년이나 됐어요.” 사진을 찍기 위해 웃어보라고 했지만 “웃을수록 마음만 아프다”며 금세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란 출신인 그는 한국에서 대니(Danny)로 불린다. 대니는 2008년 한국의 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기독교인이 됐다. 무슬림이었던 그의 개종 소식은 고향에 알려졌고 귀국하면 핍박을 받을 것을 우려해 불법체류를 해오다 지난해 8월, 난민 신청을 했다.

그에겐 샤키바라는 15살짜리 딸이 있다. 2003년 고국을 떠날 때만 해도 딸은 귀여운 어린아이였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몰라보게 자란 딸의 사진이 저장돼 있었다. 아빠를 닮았다.

“1주일에 두세 번 전화해요. 미안하다고 말하죠. 마음이 안 좋아요.” 그는 마음이 안 좋다는 표현을 많이 썼다. 10년의 한국 생활, 돌이켜보면 좋은 날이 없었다.

대니는 2003년 사업차 한국에 왔다. 비즈니스가 영 신통치 않았다. 체류기간을 넘기며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급하게 찾은 일터가 유리공장이었다. 185㎝가 넘는 키에 무거운 것을 잘 들어서 무작정 시작했다. 처음 130만원을 받던 월급은 지금 180만원으로 올랐다. 하루 10시간을 일하며 수입 절반은 가족에게 송금했다.

2005년엔 어머니가 유방암 수술을 받고 고통을 호소하다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마지막 전화 내용은 “왜 안 오냐”였다. 2남2녀의 장남. 자식 된 도리를 하지 못한 그는 눈물만 삼켰다. 그의 오른팔에는 ‘엄마 보고 싶어요’라는 한글 문신이 새겨져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썼다고 했다.

3년 전엔 참다못한 아내가 딸을 데리고 무조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아내는 한국 입국비자가 없어 다른 나라 여권을 위조해 들어오려다 공항에서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3일 후 이란으로 추방됐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지난해 초 그와 이란의 가족들 모르게 이혼 신청을 했고 이 사실을 안 딸은 날마다 슬픔 속에 지내야 했다. 대니는 또 다시 좌절했고 어떻게 하든 딸을 데려와야 한다고 결심했다.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한국의 이란인교회가 지난 6월 딸을 초청하려고 보증까지 해줬지만 3년 전 아내의 위조 여권 때문에 딸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을 통보받고 절망을 거듭해야 했다.

“어떻게 미성년자를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딸만 만나면 됩니다.”

그가 사는 원룸 방에는 작은 탁자가 놓여 있다. 탁자 위엔 이란어 성경과 ‘당신이 기도할 때’라는 제목의 기도책자가 있었다. 퇴근해서 탁자 앞에 앉아 기도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언젠가는 내 기도를 들어주시겠죠?” 추석이 지나면 그의 기도가 이루어질까.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