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이 부른 죽음…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에 있었다면
입력 2013-09-13 17:55 수정 2013-09-13 18:14
혹한에 ‘쓰러진 노숙자’ 쫓아낸 역무원 무죄 확정
노숙인 장모씨가 서울역사 2층 대합실에서 만취해 쓰러진 상태로 발견된 건 2010년 1월 15일 아침이었다. 오전 7시15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과 119구급대원들은 장씨를 단순 주취자로 판단해 그대로 둔 채 자리를 떴다. 장씨는 오른쪽 갈비뼈 11개가 부러진 상태였다.
15분 후 서울역 내근과장으로 근무하던 박모(47)씨가 장씨를 발견했다. 박씨는 함께 순찰하던 공익근무요원에게 “노숙자를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공익근무요원은 대합실 출구 밖 대리석 바닥으로 장씨를 옮겼다.
1시간 뒤 다른 공익근무요원 김모(30)씨는 “노숙인이 쓰러져 있으니 확인해 보라”는 무전을 받았다. 김씨는 장씨를 휠체어에 태워 서울역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옆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청소 중인 직원이 “거기 두면 안 된다”고 제지했고, 결국 김씨는 200m 떨어진 서울역사 밖의 구름다리(과선교) 아래에 장씨를 두고 왔다. 당시 서울역 앞 노상의 체감온도는 영하 9.7도. 장씨는 오후 12시22분 다리 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씨와 김씨는 유기죄로 기소됐다. 장씨에 대해 적절한 구호 조치를 할 의무가 있는데 하지 않았다는 게 기소 요지였다. 그러나 대법원 3부(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13일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우리 형법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채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나온다. 강도를 당해 길에 쓰러진 유대인을 보고 당시 사회 상류층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두 그냥 지나쳤지만, 유대인과 적대 관계였던 사마리아인이 나서서 그를 구해줬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방관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이다. 자신이 위험해질 상황이 아니라면 곤경에 처한 이를 나서서 구해주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프랑스 독일 폴란드 등은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는 과도한 처벌을 방지하기 위해 법률상 부조 의무가 있는 자에 한해서만 유기죄를 적용한다.
이 사건의 1심 재판부 권태형 판사는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두 서울역 직원의 매정한 행위를 지적했다. 권 판사는 판결문 말미에 “노숙인이었던 망인은 이날 참으로 고달픈 하루를 보냈을 것”이라며 “성치 않은 몸으로 타인에게 부축당하거나 휠체어에 실려 여기저기 다니다 결국 차가운 곳에 버려져 이승을 하직했으니 그 심신의 피로가 오죽했을까 싶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피고인들은 형사책임을 떠나 망인의 죽음 앞에 도덕적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권 판사는 “노숙인은 우리 사회가 양산한 사람들이면서도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며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많은 고민을 남친 채 먼 길을 가는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판결문을 맺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