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응급실’ 닥터헬기 르포] 날마다 死線 秒와 싸운다
입력 2013-09-14 04:09
#1. “트랙터 전복 머리 다쳐… 큰 병원으로 가야합니다”
지난 10일 오전 11시24분. 경북 안동병원 응급항공의료센터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안동시와 인접한 예천군에서 농사일을 하던 박모(58)씨가 트랙터 전복 사고를 당해 인근 병원으로 실려오자 의료진이 25㎞ 떨어진 안동병원 응급항공의료센터에 ‘닥터 헬기’ 출동을 황급히 요청한 것이다. 박씨의 머리와 얼굴 등이 워낙 많이 손상되고 출혈량이 많아 응급 수술 및 수혈이 가능한 큰 병원으로 급히 옮겨야 했다.
안동병원 응급의학전문의 김권 과장이 예천 의료진과 짧은 통화를 나눈 후 “두개골 골절, 지주막하 출혈 소견이 있다고 한다. 응급 수술이 필요할 것 같다”며 헬기 출동을 결정했다. 바로 옆 운항통제실에 상황 발생 위치와 기상상황을 점검하던 운항관리사 천박관(43) 차장이 “아침에 안개가 많이 끼어 걱정했는데, 지금은 많이 걷혔다. 헬기 이·착륙에 문제없다”며 출동을 승인했다. 운항통제실 모니터에는 환자 인계점(환자를 인계받는 지점)과 주변 지역의 실시간 기상상황이 표시돼 있었다. 천 차장은 “가장 가까운 인계점은 예천군공설운동장”이라고 알렸다.
최종 출동 결정이 나자 김권 과장과 정상민(29) 응급구조사가 센터 바로 옆에 세워져 있던 앰뷸런스에 지체없이 올라탔고, 닥터 헬기가 대기 중인 5분 거리의 시민운동장으로 내달렸다. 닥터헬기는 운항통제실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고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헬기 운영을 맡은 대한항공과 중앙응급의료센터의 사전 승인을 받아 기자도 ‘닥터 헬기’에 함께 탑승했다.
예천으로 날아가는 동안 김 과장은 응급항공의료센터와 무선 통신으로 계속 환자 상태를 파악했고, 안동병원 응급실에는 응급 수술팀을 준비시켰다. 김 과장은 정 응급구조사에게 “트랙터에 깔렸으면 복부나 흉부 출혈도 있을 수 있어 내부 손상 여부를 알 수 있는 휴대용초음파기 사용이 필요할 수 있다”며 점검을 지시했다.
헬기 이륙 10분 만에 환자 인계점인 예천공설운동장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환자 상태는 심각했다. 오른쪽 머리가 크게 찢어져 살이 훤히 보였고, 귀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김 과장은 “내부 출혈이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김 과장은 헬기 이송 중 환자의 다친 머리를 붕대로 감아 지혈하고, 목 보호대를 끼웠다. 헬기가 안동병원 옆 계류장에 도달해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한 시각은 낮 12시1분. 출동부터 최종 이송까지 걸린 시간은 37분. 구급차량을 이용했으면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다. 박씨는 도착 후 머리와 가슴 CT 촬영 결과 골절이 확인돼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김 과장은 “응급환자가 치료로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시간, 즉 ‘골든타임(golden time)’이 중증 외상은 1시간, 뇌졸중은 3시간”이라면서 “박씨의 경우 조금만 시간이 지체됐어도 위험했을 것”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 중증 외상 1시간, 뇌졸중 3시간… 골든타임 사수하라
응급의료 전용 닥터헬기는 ‘하늘을 나는 응급실’로 불린다. 기장과 부기장, 응급의학전문의, 응급구조사(간호사), 환자(2명까지 가능) 등 최대 6명까지 탑승 가능한 헬기에는 환자 내부 출혈 여부를 알 수 있는 응급초음파기기, 심근경색 진단을 위한 12유도심전도와 효소측정기 등 고성능 응급 장비를 갖추고 있다. 환자 이송 중에 제세동(심장박동)과 심폐소생술, 기계 호흡, 기관 절개술, 정맥 확보와 약물 투여 등 전문 처치도 가능하다. 정 응급구조사는 “이밖에 응급의약품 30여 가지가 구비돼 있어 웬만한 응급실을 통째로 옮겨놨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3. 봉화 119구급대로부터 긴급 전화
산지가 많고 고령층 비율이 높은 경북의 경우 대형 사고로 인한 중증 외상뿐 아니라 뇌졸중, 심근경색 등 심뇌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응급 환자의 출동 요청도 적지 않다. 지난 9일 오후 3시5분 경북 봉화군의 119구급대로부터 긴급 전화가 걸려왔다. 70대 할머니가 밭일을 하다 갑자기 쓰러졌고 뇌졸중이 의심되니, 닥터 헬기를 요청한다는 전화였다. 대기 중이던 김병철 응급실장이 “환자 의식은 있나요? 혈압은?” 등 질문을 쏟아냈다. 뇌졸중의 경우 환자 의식이나 혈압이 중증도를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다.
김 실장은 “작은 뇌졸중 증상 같은데, 놔두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빨리 이송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환자 인계점은 봉화공설운동장으로 결정됐다. 운항통제실 천 차장은 “항공법상 가시거리가 5㎞가 안 되거나 구름이 기준 이상으로 많이 끼면 헬기가 뜨지 못하는데, 현재 봉화 지역은 맑아 헬기 운항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실장과 유인재(29) 응급구조사가 한 팀을 이뤄 봉화까지 12분 만에 날아갔다. 봉화 공설운동장까지 왕복 70㎞, 차량으로는 1시간 넘게 걸린다.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119구급대로부터 환자를 넘겨받았다. 77세 정모 할머니는 의식은 있었지만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고 발음은 어눌했다. 김 실장은 “팔다리 마비는 없는 걸로 봐서 작은 뇌혈관이 막힌 것 같다. CT 촬영 등 정밀 검진을 해봐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헬기에 몸을 맡긴 할머니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유 응급구조사가 “병원에 다 왔으니 걱정 마세요. 따님은 뒤따라 병원으로 오신대요”라며 안심시켰다. 정 할머니의 안동병원 응급실 도착 시각은 오후 3시45분. 첫 도움 요청에서 이송 완료까지 40분이 소요됐다. 정 할머니는 다행히 수술 없이 혈전(핏덩어리) 예방을 위한 투약 치료만 필요한 것으로 진단됐다. 김 실장은 정 할머니의 입원 수속을 지켜본 뒤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만약 빠른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더 큰 뇌졸중이 왔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4. 취약한 응급의료… 생명 지킴이 톡톡
안동병원은 지난 7월 5일부터 경북도내 총 23개 시·군 가운데 북부지역 12개 시·군(안동·영주·문경·상주시, 울진·봉화·예천·영양·청송·의성·군위·영덕군)을 중심으로 닥터헬기를 운행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조사 결과, 경북의 응급환자 발생 수는 2011년 말 기준 58만3486명으로 16개 광역단체 중 여섯 번째로 많다. 특히 응급환자 병원 도착 전 사망률은 0.627%로 충북(0.884%), 강원(0.835%)에 이어 3위다. 응급의료 인프라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얘기다. 경북 도내 응급의료기관 36개 중 권역응급의료센터(대형 재해시 응급환자 진료 가능한 의료기관)는 안동병원이 유일하다. 대학병원 같은 상급종합병원은 아예 없다. 응급환자 진료가 가능한 지역응급의료센터는 경북 10개시 중 6개시에만 지정돼 있고 응급의료 제공이 가능한 지역응급기관은 23개 시·군 중 3개군(의성, 영양, 영덕)에는 하나도 지정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김병철 실장은 “특히 울진·봉화·영양·청송·영주 등 경북 북부권은 면적에 비해 인구수가 적고 산이 많아 교통이 불편하다. 때문에 중증 외상, 심뇌혈관질환 등 3대 응급질환의 최종 치료가 가능한 안동병원에 접근할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나마 안동병원에 닥터헬기가 도입된 이후 지난 5일까지 2개월간 43명의 중증환자를 긴급 이송하는 등 지역 응급의료 안전망 구축에 기여하고 있다. 병원 관계자는 “닥터헬기는 소방헬기와 달리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탑승해 현장 도착 시점부터 응급 치료를 시행하고 항공 이송 중에도 병원과 교신하면서 의료진과 장비를 대기시켜 1분 1초가 중요한 응급 환자 치료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안동병원 항공의료팀은 응급의학과 전문의 7명을 비롯해 응급구조사, 코디네이터 등 10명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닥터헬기 운행 시간은 일출부터 일몰 때까지, 365일 연중무휴다. 김권 과장은 “곧 추석인데, 연휴기간 중에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한 응급환자가 늘 수 있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병원 측은 닥터헬기 활성화를 위해 현재 80곳인 환자 인계점을 고속도로 주요지점 등을 추가로 확보해 200곳까지 늘릴 계획이다. 하지만 최근 병원 옆 헬기 계류장이 인근 채소농사에 방해 된다는 민원이 제기돼 헬기 계류장을 시민운동장으로 옮기는 바람에 이송 시간 단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안동=글·사진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