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김종양] “아프리카에 빵과 약만 주시겠습니까? 그들을 바로 세우는 건 복음·교육”

입력 2013-09-13 18:34 수정 2013-09-13 15:31


아프리카대륙비전 김종양 스와질랜드선교사

이번 주도 어김없이 장례식에 가야 했다.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가장 창궐한 곳으로 손꼽히는 스와질란드의 선교사이자 목사인 그는 거의 매주 교인의 장례식에 참석, 고인을 위해 기도했다. 사망자 대부분이 에이즈 환자이다 보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교인도 적지 않았다. 무덤 앞에서 교인을 위해 기도하던 그는 속울음을 삼켰다.

‘이 젊은 친구들 장례를 치르기 위해 하나님께서 날 이곳에 부르신 건 아닐 텐데. 이들이 죽기 전에 뭔가 도울 순 없을까?’

복음 전파와 함께 의미 있는 일을 찾던 그에게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2006년 스와질란드 교육부 관계자가 김 선교사를 찾아와 의대와 공대 설립을 요청했다. 그가 한국교회 성도의 후원으로 2002년 스와질란드에 설립한 사임크리스천고등학교가 현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게 계기가 됐다. 평소 현지인 의료·기술 선교사 양성을 위해 기도해온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프리카대륙비전(ACM·이사장 이영근 목사) 대표 김종양(67) 선교사가 스와질란드 최초의 의대인 스와질란드기독대학교(SCU) 설립을 추진한 건 이때부터였다. 지난 28년 동안 스와질란드, 모잠비크, 케냐 등 아프리카 7개국에서 교회, 학교, 고아원, 기도원 등을 세우며 선교활동을 펼친 그였지만 의대를 비롯한 종합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후원자들과 주변 목회자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현지 정부와 시민단체, 언론의 태도 변화도 그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많은 현지인들이 선진 의료기술을 배워 에이즈를 극복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길 소망했던 그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만약 제가 똑똑했다면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식하면 겁도 없다고, 무턱대고 뛰어든거죠.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날도 많았지만 이 일이 실패할 거란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이건 내 사업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죠.”

기술연수생에서 아프리카 선교사로

“당신, 신학공부 해서 선교사를 해요. 세상에 전문 기술자야 얼마든지 있지만 선교사는 부족합니다.”

1976년 미국인 독일 선교사 브라이스 목사는 당시 독일정부 국비유학생이던 김 선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기술을 배워 성공한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독일로 기술연수를 온 그는 어학 공부를 위해 등록한 독일어 학원에서 브라이스 목사를 만났다.

종교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던 그는 한국병원선교회 소속 파독 간호사들의 전도로 독일에서 처음 복음을 접했다. 관광 삼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한국병원선교회 수련회에 참석해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 타지에서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던 김 선교사는 이날 처음 드린 예배에서 깊은 감명과 위로를 받았다.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그날 이후 병원선교회 사역을 물심양면으로 돕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모습을 눈여겨 본 브라이스 목사가 선교사가 될 것을 권했다.

“독일 정부에서 한국 장학생을 3명 뽑았는데 그중 한 명이 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 믿게 되니 점차 기술연수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보람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지더라고요. 연수기간이 1년 남았지만 브라이스 목사의 조언대로 독일 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선교지를 아프리카로 정한 뒤 영국 웨일스 신학교(Bible College of Wales)로 학교를 옮겼다. 아프리카 선교단체가 많은 영국에서 더 전문적이고 특화된 선교를 배울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영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85년 11월 선교지인 말라위로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고난으로 얻은 열매

말라위 원주민 선교를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도록 그는 파송 단체의 선교후원금을 받지 못했다. 선교회 간사가 실수로 우체국 사서함 주소를 잘못 입력해 벌어진 일이었다. 마땅히 살 곳을 구하지 못했던 그는 원주민 성도의 가정집에 들어가 지냈다.

원주민 빈민촌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밤에 모기떼와 도마뱀이 괴롭히는 바람에 그는 매일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위생적이지 않은 식사도 그에겐 고역이었다. 개미 섞인 식빵과 염소고기 한두 조각으로 끼니를 때웠던 그는 항상 배가 고팠다.

3개월 뒤 선교후원금을 받은 이후에도 말라위에서의 생활고는 계속됐다. 현지인 목사들은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김 선교사에게 달려왔다. 대부분 경제적 문제였다. 그의 집에 살다시피 하며 식사를 해결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돈을 빌려 달라는 이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김 선교사 때문에 정작 그의 가족이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으로 그는 덤불에서 외딴섬처럼 지내는 현지 성도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알게 됐다. 하루하루를 간신히 연명하는 이들에겐 복음뿐 아니라 빵 역시 필요했다. 아프리카 오지에 교회를 설립키 위해 85년 아프리카대륙선교회(ACM의 전신)를 만들어 말라위에 교회와 신학교를 설립하던 그는 이들을 돕기 위해 사역 영역을 넓혀 보건·교육시설을 세웠다. 전쟁과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어린이를 위해 고아원을 마련했고 각종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진료소와 병원을 세웠다. 또 학교가 멀어 교육받지 못하는 어린이를 위해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선교지의 상황에 맞게 교회, 학교, 사회복지시설을 세우며 교회를 세웠지만 사역을 인정받기까지는 꽤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88년 말라위에서 스와질란드로 사역지를 옮긴 김 선교사는 교회개척, 신학교, 고아원 등의 사역과 더불어 94년 수도 음바바네 마활랄라 지역에 이스드라교회를 세우고 현지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목회를 했다.

원주민 청년의 방을 빌려 시작한 교회는 얼마 안돼 500여명이 모이는 지역의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놀라운 성장에 이를 시기한 사교(邪敎) 집단은 ‘한국에서 온 목회자가 어린아이의 피로 성찬식을 한다’는 거짓 제보를 언론사에 흘렸다. 그는 교회를 폐쇄하고 추방당할 위기에 빠졌으나 현지 성도들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곧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해당 언론사에서 대대적으로 정정보도를 내보냈지만 이 여파로 김 선교사는 한동안 스와질란드에서 선교활동을 하는데 애를 먹었다.

이밖에도 김 선교사는 풍토병에 걸리고 모함에 휘말리는 등 갖은 고난을 겪었으나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사역 범위를 확장하며 선교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빈민촌에 있을 때 폐병과 심장병을 얻고, 선교지에 가다 자동차 사고를 당했을 때 ‘이대로 죽겠구나’란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으로 저를 겸손케 하셨고 그간 한 일보다 더 큰 결과를 얻게 하셨습니다. 부족한 영어에도 제가 설교할 때 많은 현지인이 주님을 영접케 해서 교회가 빠르게 성장했고 계획하지 않았음에도 사역이 확장돼 학교, 고아원 설립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전 확실히 알았습니다. 선교지 사역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하다는 것과 선교사가 세례요한처럼 고난이 있어도 그저 묵묵히 예수님의 앞길을 준비할 때 현지인에게 열매를 줄 수 있다는 것을요.”

교육이 희망이다

2012년 현재 ACM은 중앙·남부 아프리카 7개국에 500개 교회를 개척했고 2개국에 에이즈 고아원을 설립했다. 남아공에는 임마누엘신학교와 기도원을 세웠으며 말라위와 모잠비크, 스와질란드 등에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지었다. 앞으로는 1000개 교회를 개척하고 7개 나라에 신학교를 세워 더 많은 아프리카 지역 곳곳에 현지인 목회자를 파송할 계획이다.

이들 가운데 무엇보다 김 선교사가 주안점을 두는 사역은 교육선교다. 그는 복음과 교육만이 아프리카를 변화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 확신했다.

“예수를 마음속에 모신 사람은 그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요.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지요. 하지만 국가를 바꾸는 데는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선 이들 스스로 영성뿐 아니라 실력을 갖춰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소명을 가진 이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아프리카가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달 개교한 SCU는 간호학, 임상병리학을 비롯한 5개 학과가 개강해 350여명의 학생이 수업을 듣고 있다. 현재 본관만 지어졌다. 내년쯤 10개의 강의실 및 실험실이 완공되면 의학·신학·예술대학 수업이 연이어 개강해 영국과 남아공 대학의 교수들이 200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칠 예정이다. 특히 의대의 경우 남아공에서 의대로 유명한 프레토리아 대학과 협약을 맺어 양질의 교육이 제공된다.

SCU 설립 제안은 스와질란드 정부가 했지만 건물 설립 비용은 온전히 ACM이 맡는다. 76만331㎡(23만평)의 부지를 제공하고 운영비를 제공하며 교육이념을 존중하는 대신 건축비는 사역을 지원하는 한국교회 성도와 개인 후원자들이 마련한다. 추후 건축될 대학병원도 건축비용의 60%는 한국 후원자들이 감당할 예정이다. SCU 제안을 직접 받은 책임자로서 후원금 때문에 염려되진 않는지 물었다.

“걱정되는 일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기도하며 꿈꿨던 교육선교의 비전이 이제 후원자를 넘어 현지 정부 관계자까지 공유되고 있어요. 전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일에 사명감을 갖게 되는 거니까요. 사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들어오는 선교후원금은 항상 부족하거든요. 하지만 놀라운 건 항상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거지요. 전 언어와 문화가 같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SCU에 모여 하나님의 비전을 꿈꾸는 그날까지 주님의 심부름꾼으로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음바바네(스와질란드)=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