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칼럼] 우분투(Ubuntu)!
입력 2013-09-13 17:34
아프리카의 토속 언어 중에 ‘코사’(Xhosa)라는 족속의 언어가 있다. 그 표현 가운데 아주 아름답고 귀감이 되는 말이 있어 소개한다. 교회에서 어린이 주일학교 놀이 프로그램이 있었다. 해외교회에서 보내온 어린이용 선물이 도착했다. 지도교사의 인도에 따라 선물을 중심으로 원을 이뤄 게임이 시작됐다. 가운데 놓여 있는 선물 보따리에 먼저 손을 대는 사람부터 좋은 선물을 나눠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몰려가서 합의한 듯 보따리에 동시에 손을 대고 기쁜 마음으로 합창하듯 구호를 외쳤다. “우분투! 우분투! 우분투!”(Ubuntu!)라고. “우리가 있기에 그 안에 내가 있다!”는 뜻이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시 133:1). 이것은 성서의 언어이다. 신약성서의 용어로 ‘코이노니아’라고 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하나님이 한분이자 삼위이듯이, 우리도 서로 다른 주체들이나 하나의 공동체로 엮여져 사는 공동체적 실체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것을 아프리카 사람들은 ‘우분투’라고 정겹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 복음을 접하고 주님과 하나 되고 서로 간에 하나 되어 공동체로 살아가는 신도의 공동체 내용을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행 2:42)고 쓰고 있다. 신앙의 공동체는 생존의 공동체요, 나눔의 공동체요, 사랑의 공동체요, 영성의 공동체이다.
우리나라의 언어 속에는 ‘나’보다는 ‘우리’가 근간을 이룬다. 대가족 제도 하에서 생겼다고는 하나 내 아내는 ‘우리 아내’이고, 내 남편은 ‘우리 남편’이다. 내 자식보다는 ‘우리 자식’이고, 그것이 사회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내 나라보다는 ‘우리나라’, 내 가정이기보다는 ‘우리 가정’, 내 교회이기보다는 ‘우리 교회’이다. ‘우리 문화’가 최소한 언어 사용으로는 익숙하고 보편화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서는 문제가 많다. 서양의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공공질서나 공중도덕이 우리나라 사회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한밤중에 빨간 신호등 앞에 홀로 서 있는 차량을 서울에서 본다면, 그 사람은 바보일까. 서양의 선진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상식인데, 우리를 강조하는 공동체적 사회인 우리사회에서는 신호등에 레이더망이 없는 경우 신호무시가 다반사로 되어 있는 삶의 현실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행실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헛것이라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못하는 언어는 공허함일 뿐이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공동체적 결속은 나홀로의 이기주의보다 훨씬 아름답고 즐거워야 한다. 아니 훨씬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적 결속을 힘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고 하면 공동체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공동체가 정의롭고 공평하다고 느껴야 한다. 그것이 공정성이다. 만인이 법 앞에 평등임을 아무리 강조한들, 힘 있는 자는 큰 범법자로도 솜방망이 처벌이고 힘없는 약자는 작은 범법행위에도 중죄처벌을 받는다면, 바로 공정성이 없기에 공동체가 행복해질 수 없다. 강자와 가진 자의 공공윤리와 공공도덕성이 크게 강조되어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를 제대로 구현하자고 외치는 이유를 모두가 인정한다.
공동체성이 살려면 공동체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공정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권리만 있으면 강자 중심의 획일화로 치닫고 독주 내지 독재가 된다. 권리는 반드시 의무를 수반해야 한다. 상대방의 자유를 보장하는 범위에서의 자신의 자유요, 상대방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바탕위에서의 하나 됨이다. 그렇게 되면 그런 공동체는 자유인의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공동체가 된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생각과 삶의 형식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다양함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사회가 동시에 행복할 수 있다. ‘다양성 속의 하나 됨’이 공동체의 핵이고 틀이다.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공동체를 이뤄갈 수 있는 기본 영양소인 관용과 포용의 정신이다. 그래야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 이 말속에는 “내가 있어서 우리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 당연히 포함된다. 이 둘을 합한 ‘코이노니아’를 이 땅에 이룰 권리와 책임을 우리 모두가 즐겁고 기쁘게 부여받고 있다.
(경동교회 담임목사)